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따르면, 협동조합이란 ‘함께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업체를 통해 공통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 욕구와 갈망을 충족하고자 자발적으로 단결한 사람들의 자율적 결사체’로 정의된다. 이러한 협동조합은 농협, 수협 등으로 대표되는 생산자 중심 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으로 대표되는 소비자 중심 조합으로 대별된다. 의료서비스의 소비자인 시민들이 조합원으로서 출자하고,또 운영에 참여하는 의료복지생협(이하 ‘의료생협’)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 일본 의료복지생활협동조합의 역사

일본 의료생협의 근거법이 되는 ‘소비생활협동조합법’은 ‘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 점령기’였던 1948년 제정되었다. 전쟁 직후의 심각한 사회적 혼란과 빈곤으로 아우성이 끊이지 않던 시절,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의료서비스의 미비’였다. 전 국민대상 의료보장 실현을 위한 ‘국민개보험(国民皆保険ㅊ)’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1961년이다. 게다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정책적 차원에서 의료 기관이 도시부에 집중되어 온 결과, 지방에는 의료시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주민들의 참여에 의해 위생상태 개선,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 진료소가 개설되었고, 진료소를 중심으로 의료생협 설립운동이 점차 확대되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현재 일본의료복지생협연합회의 회원생협은 총 104개, 조합원 수는 약 290만 명에 이른다. 이는 무려 전 국민의 약 2.5%에 해당하는 규모다.

일본 의료생협의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의 의료생협이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 단위의 문제 개선을 위한 비교적 소규모의 사회운동부터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범세계적 활동까지 내용은 천차만별이지만 조합원 및 직원 주도의 활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오늘날 일본 현실에 비추어보면 그 특색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 의료생협을 둘러싼 제도 동향

지난 3월호 기사를 통해 소개한 바 있듯 일본에서는 2012년 8월에 가결 및 성립한 ‘사회보장과 조세의 일체개혁관련법 8법’을 통해 ‘자조(自助)·공조(共助)·공조(公助)’라는 사회보장의 원칙이 제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세대형 사회보장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가족 및 지역 내 상부상조, 즉 ‘공조(共助)’ 실현을 위한 의료·개호서비스 전달 체계 구축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것이 바로 ‘지역포괄케어시스템’이다. 후생노동성에 의하면, 지역포괄케어시스템은 ‘고령자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나다운 삶을 인생의 마지막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주거, 의료, 개호, 예방, 생활지원 등의 각종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전달체계’로 정의된다. 이 개념은 2005년 ‘개호보험법’ 개정을 통해 최초로 제시되었으며, 이후 2014년 시행된 ‘의료개호종합확보추진법’을 통해 ‘의료와 개호를 동시에 다루는 지역포괄케어시스템 구축’ 계획이 법제화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는 단카이(団塊) 세대(1차 베이비붐시기, 1947년부터 1950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가 후기고령자인 75세 이상이 되는 2025년까지 전달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중시되는 원칙은 각 지역자치단체의 자율성과 주체성, 지역의 특성 강화로, 이에 따라 지역밀착형 민간주체이자 의료·개호서비스에 있어 핵심 주체인 의료생협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 의료생협 사이타마의 사례

사이타마현은 수도인 도쿄도의 북부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인구수 전국 5위, 인구밀도 전국 4위의 대도시권 지역으로 도쿄와 가까운 남부에 인구가 밀집된 특징이 있다. 이를 본거지로 하는 의료생협 사이타마는 2023년 6월 현재 조합원 수가 무려 23만6000명, 조합원으로부터의 출자금 총액은 65억4000만 엔(약 650억 원), 총 사업수익은 243억 엔(약 2430억 원)에 이르는 일본 최대 규모의 의료생협이다.

의료생협 사이타마는 1953년 6월 개설된 가와구치 진료소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가와구치 진료소는 한반도에서 온 강제징용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십시일반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사이타마현 각지에서 설립된 의료기관들이 ‘환자의 입장에 선 친절한 의료’라는 기치 아래 ‘사이타마민주의료기관연합회’를 창립하고, 사회보장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사회운동과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의료사업을 전개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의료생협 사이타마는 오늘날에도 의료비의 일부 혹은 본인부담금 전액을 면제하는 ‘무료·저액진료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생협이 독자적으로 운용하는 사업이므로 정부지원 없이 비용 전액을 생협 재정으로 충당한다. 2022년 기준 이용 횟수는 총 769회에 달한다.

의료생협 사이타마는 2023년 현재 병원 4개소, 진료소 10개소, 노인보건시설 2개소, 개호사업소 18개소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건강 증진’, ‘교육 증진’,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조직 강화’를 목표로 앞서 언급한 사회보장제도의 변화에 발 맞추어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면서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스템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사이타마현 북부에 위치한 인구 8만 명 규모의 소도시인 교다(行田)시에 2018년 설립된 교다협립진료소(行田協立診療所)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교다협립진료소는 의료기관과 개호시설을 통합 운영함으로써 연계를 극대화하여 서비스의 질을 높였으며, 동시에 시민들이 목적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지역교류공간을 갖추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한 중요한 원동력은 바로 지역주민의 적극적 참여이다. 놀랍게도 교다시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조합에 가입하고 있으며, 다양한 팀을 이루어 지역사회를 위한 각각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의료생협 사이타마의 활동은 크게 ‘이바쇼(居場所, 개인이 안심할 수 있는 심리적·정신적·물리적 공간) 만들기’, ‘곤궁자 지원’, ‘생활지원’, ‘의료 및 개호사업’ 등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이바쇼 만들기’는 의료·개호서비스 제공 못지 않게 역점을 두고 있는 활동 중 하나다. 이는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지역 내에서 교류하며 함께 즐기고 살아갈 수 있는 관계·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운동이나 체조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건강 광장(健康ひろば)’, 함께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며 취미활동을 공유하는 ‘안심 룸(安心ルーム)’, 각 지부의 활동 홍보를 통해 더 많은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지역활동 거점’ 등을 총 159개 지부 중 105개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도 몇몇 지부에서는 사회보장제도 개선 운동과 지역활성화를 위한 학습모임인 ‘삶의 학교(暮らしの学校 )’,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부터 고령자까지 다양한 세대가 같이 식사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적 고립을 예방하는 ‘다세대식당’, 치매 환자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인 ‘오렌지카페’ 등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입원기간을 단축시키려는 정부 정책에 발맞추어 퇴원자들의 건강상태와 생활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지원하기 위한 퇴원지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지역 내 주민자치단체 및 자원봉사자들과의 연계·협력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공조(共助), 즉 가족·지역 내 상부상조를 실현함에 있어 그 역할이 강조되는 민간 핵심 주체 중 하나로서의 고민과 노력의 결실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의료생협 사이타마 또한 독자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크게 평화유지를 위한 단체활동과 사회보장제도 개선을 위한 집단행동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사례로는 원자수소폭탄금지 세계대회 대표단 파견,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회의 참가, 오키나와 미군기지 철수 운동 등이 해당된다. 후자의 사례로는 국회에 대한 의견제출, 제도개선 요구 서명활동 및 집회, 지역 내 건강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회 개최 등이 있다.

 

○ 일본 사례의 시사점 

일본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단어 중 하나가 개인주의다. 현상을 규정하기에 적절한 용어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잠깐 차치해두자. 투표율과 파업은 이를 잘 드러내는 지표다. 일본의 국정선거 투표율은 해를 거듭할수록 감소하여 직전 선거 투표율은 약 56%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2022년 한국 대선 투표율보다 21% 낮은 수치이다. 또한 노동쟁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인 임금노동자 1000명당 연평균 근로손실일수는 2012~2021년 평균 0.2일로 이는 38.5일을 기록한 우리나라의 0.5%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일본은 미국과 인도 다음으로 많은 협동조합 조합원을 기록하고 있는 국가로써 약 7700만 명이 협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다. 정치참여와 집단행동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일본에서 의료생협 등 협동조합에 어떻게 이처럼 많은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었을까?

다양한 관점에서의 분석이 필요한 의문이겠지만 한 가지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역사의 깊이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의료생협은 전쟁 직후부터 빈곤층과 노동자들의 삶을 오랜 기간 지탱해왔다. 역사의 축적 과정을 통해 조직의 성격과 역할은 구체화되었고, 사회적 신뢰를 확보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에야 의료생협이 최초로 설립되고, 2010년을 전후해 의료생협이 급격히 증가했다. 2011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으로 비영리법인격을 갖는 사회적협동조합법인격의 조합 개설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법인격을 전환한 의료생협도, 주민들의 출자로 운영되는 의료생협도 여전히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고유한 위치와 역할을 확립했다고도, 주민들의 참여 동인이 충분하다고도, 사회적 신뢰를 충분히 얻었다고도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인구감소사회. 더 이상 미래가 아닌 우리의 현실이다. 제도와 정책으로 완벽히 대응하기 어려운 개인적 차원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돌보기 위해 사회적 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민간부문의 중요한 주체로서 의료생협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무엇이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떤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일본을 포함하여 다양한 해외사례를 참고로 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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