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은 사람들 삶의 모든 측면에 큰 영향을 미친다. 행동, 건강, 업무는 물론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변하게 된다. 정신건강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럼없이 밝히는 사람도 늘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도 많아졌다. 특히 호주는 정신건강 서비스에 있어 선진적인 나라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지만 정작 호주의 정신질환자와 그 가족들은 여전히 서비스가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정신건강 문제 해결을 위해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혹자는 우울증을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마음의 감기라 표현하지만 이는 자신의 의지로 치료하기 쉽지 않고, 치료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노인의 외로움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느끼는 당연한 감정으로 여겨진다. 정신장애의 경계선에 있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아이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채로 삶을 살아야 한다. 전문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해 주는 사회복지사, 처참한 사고 사례를 직접 눈으로 봐야 하는 의료진 중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도 많다.

정신건강 문제를 다루는 호주의 사회복지 시스템이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기술 발전,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웰빙을 더 잘 관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수요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호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성인 인구의 절반이 넘는 약 730만 명의 사람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정신건강 문제를 겪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신체적 질병에 걸리거나 실직할 위험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호주 정부는 정신건강 문제로 인한 추가 의료비로 1년에 한화 약 200조 원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하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 호주 정신건강 정책의 역사와 개요

호주 최초의 국가 정신건강 정책은 1992년에 발표되었다. 이 정책은 2020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지난 30년간 이루어진 가장 큰 변화는 독립형 정신병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지역사회 기반 치료와 급성 응급 환자를 공공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한 기반 시설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정신건강 증진과 정신질환 예방, 1차 의료 서비스 제공자와 정부, 지역사회가 함께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것도 큰 성과로 여겨진다.

다섯 차례의 개정안 중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은 2012년 발표된 제4차 개혁안이었다. 이 개혁안에서 처음으로 ‘개인 맞춤형 정신건강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국가 정신건강 개혁 10년 로드맵’이 발표됐다. 개인 맞춤형 치료는 정신건강 서비스의 소비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보호자도 지원 대상으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중증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열악한 생활환경, 불충분한 임상 지원, 빈번한 인권 침해 논란이 발생하는 대형 정신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주는 정신병원에서의 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환자에 대한 조기 개입을 통해 중증 정신장애로 발전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동과 청소년 중초기 정신질환 징후를 보이거나 발병 위험에 처한 환자를 조기에 치료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약물·알코올 중독 환자 역시 지역사회에서 맞춤형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호주의 정신건강 서비스

지역사회 정신건강 치료(community mental health care, CMHC) 서비스는 건강한 사람도 갑자기 악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와 가족은 가까운 곳에 있는 다양한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통해 필요한 도움을 빠르게 받을 수 있다. 온라인과 전화를 통한 상담과 지원 요청도 가능하다. 지역사회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는 서비스 이용자가 의미 있는 직업과 사회활동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통계에 따르면 2020~21 회계연도에 약 48만1500명의 환자가 지역사회 기반 정신건강 서비스를 이용했고, 이들에게 제공된 서비스는 총 1020만 건에 달했다. 이용자의 가장 흔한 주요 진단명은 달리 명시되지 않은 정신장애(25%)였으며, 그 다음으로 조현병(21%)이 가장 흔했다. 환자 본인이 아닌 제3자를 통한 서비스 요청은 15%로 이용자 7명 중 1명에 해당했다. 이용자들은 그룹이 아닌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요청했고, 38%의 이용자가 15분 이내로 서비스를 이용했다.

지역사회 기반 정신건강서비스와 함께 호주 각 주의 정신보건 서비스의 주요 체계로 작동하는 주거형 정신건강 치료(Residential mental health care, RMHC)는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전문가들로부터 정신건강 치료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서비스는 병원이 아닌 민간 시설에서 제공되며, 재활 치료또는 장기 치료가 가능하다. 58%의 이용자가 2주 미만 기간 동안 이 서비스를 이용했고, 1년 이상 서비스를 이용한 환자는 전체의 2.7%였다. 지난 5년간 주거형 정신건강 치료 입원 건수는 연평균 약 6%씩 증가했다. 2020~21 회계연도에는 총 7180명의 환자가 이 서비스를 이용했고, 이들의 질환은 조현병(23%), 특정 인격장애(16%), 그리고 우울증(10%) 등 이었다. 비자발적 서비스 이용자는 전체의 17%였다.

서비스 이용 요금은 주별로 차이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화 약 30만 원 정도를 지출하게 된다. 하지만 소득과 장애 정도에 따라 일부 혹은 대부분의 비용을 국가로부터 보조 받는다.

 

○ 차별과 편견 받는 소수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노력

정신건강 문제는 의료 서비스 제공 환경뿐만 아니라 개인적·사회적·문화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는 청각장애인들이 있다. 청각장애는 사회적·정서적·인지적 발달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언어가 확립되기 전에 발병하는 청각장애는 인구 1만 명당 약 7명꼴이며, 정신건강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많은 청각장애인은 스스로 ‘수화를 사용하는 문화적 소수자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청각장애인의 약 4분의 1은 추가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복합적인 정신건강 요구가 있을 확률이 높다. 청각장애 아동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조기에 가족과 또래와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신건강 문제 예방에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청각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2023년 8월 뉴사우스웨일스주 교육부는 호주 최초로 수화를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했다. 이 과목은 청각장애인 커뮤니티, 교사, 학생, 그리고 학부모와의 협의를 통해 개발되었으며, 수화를 처음 배우는 학생뿐만 아니라 수화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학생도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부는 청각장애로 이미 수화를 사용하는 학생에게는 커뮤니티의 언어를 공식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남성과 소년, 여성과 소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그리고 성소수자(LGBTIQ+)와 같은 특정 그룹에 대한 회적 인식이 변화하면서 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구성원은 동성애 혐오, 왕따 등 부정적인 사회적 경험으로 인해 성소수자가 아닌 또래보다 불안, 우울, 자살 생각, 자살 시도, 자해 등 정신적 고통을 경험할 가능성도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소수자의 성별과 성정체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자살 사망률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2018년 호주 라트로브대학교가 실시한 연구에서 성소수자들은 일반 인구보다 20배나 높은 비율로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성소수자라는 사실 자체가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인 낙인과 괴롭힘,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으로 인한 스트레스, 그리고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이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일부 성소수자는 의료 서비스 제공자로부터의 낙인과 차별을 경험했거나 예상하기 때문에 치료를 미루기도 한다. 호주는 이 문제를 다루는 보건 시스템이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성소수자가 겪는 특별한 압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받는 낙인과 차별을 「국가인권법」의 차별 금지 조항으로 다루도록 하고 있다.

 

○ 정신건강 증진 위한 투자로 더 생산적인 사회를…

호주 정부는 정신건강 증진과 정신질환 예방을 위한 투자는 중증 환자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뿐만 아니라, 아동, 그리고 사법 시스템을 포함한 다양한 서비스에 영향을 끼쳐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인다고 본다. 이러한 호주 정부의 태도는 유아기 아동의 품행 장애 예방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호주에는 품행 장애 증상을 보이는 유아를 위한 다양한 정서학습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고, 조기 개입과 치료를 위해 가정방문 서비스도 제공한다.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위험 요인을 없애기 위한 노력에서도 호주 정부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만성질환 환자의 치료 계획에 알코올 중독을 예방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하거나 노인들의 사회적 고립을 줄이기 위하여 다양한 지역사회 활동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정신질환자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의료진에 대한 지원 역시 우선적인 과제다. 정신건강 문제는 개인, 가족, 국가, 지역 그리고 전문가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해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한국에서는 최근 벌어진 이상동기 범죄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안이 커지면서 정부 관계부처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중증 정신질환자 사법입원제 도입 등 정신질환 치료제도 개편을 논의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 논의가 정신질환자를 사회안전의 위협요인으로 보고 격리·구속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곤란하다. 정신질환자가 지역사회에서 치료받고, 재활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우선시하는 접근방식이 더욱 생산적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것임을 호주 정부는 이미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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