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귀희 자유재활원 원장

故 최귀희 자유재활원 원장

자유재활원을 설립한 최귀희 여사는 1916년 6월 2일 경상북도 경주 감포에서 아버지 최석웅 씨와 어머니 정춘영 씨의 1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나 2007년 12월 10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최귀희는 1945년 전쟁고아 보호를 시작으로 1979년 장애인을 위한 양육과 치료에 헌신하였으며, 1947년부터 대구 YWCA 활동에 참여하여 제9대, 제13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최귀희는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설립한 경주 감포 심상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함경북도 선천의 성경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최귀희가 다니던 학교가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해 폐교되면서 피어선신학교(현재 평택대학교)로 옮기게 되었고, 이때 동문수학하던 강만승 목사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일본 오사카 일지신학교 유학 후 귀국하여 함경북도 청진에 ‘동수남 교회’를 개척하였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과 소련의 국지인 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1945년 소련이 함경북도 청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했다.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는 고아들을 교회로 데려와 기르기 시작한 ‘청진아세아고아원’이 아시아복지재단의 출발이었다.

 

○ 고아와 장애인의 어머니

 아세아고아원 신축원사 전경
아세아고아원 신축원사 전경

최귀희가 당시 함경북도 청진에 설립한 아세아고아원에서 보호하고 양육한 아동은 130여 명이었다. 이들의 보호가 사회사업의 시작이었다. 해방 후 남편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온 최귀희는 전쟁고아 수용시설인 ‘제1아동보호소’(자유원의 전신)를 위탁받아 운영하였다. 이때부터 최귀희의 손을 거쳐 사회의 주역이 된 인원이 1028명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힘이 없던 시절 사회의 가장 약한 존재는 부모 없는 아동들이었다.

자신이 낳은 자녀도 건사하기 어렵던 시대에 100여 명이 넘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최귀희의 2남 강영천은 당시 “항상 공기 빠진 축구공이 날아다니고 야구공이 허공을 가르곤 하다 보니, 여기저기 이웃집들에서는 거의 매일 유리창이 깨지고 장독 뚜껑이 망가지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때마다 사고를 친 아이를 데리고 직접 가서 고개 숙여 사죄하고 오는 것이 원장이었던 최귀희의 일과였다. 원장이 직접 찾아와서 사과할 때 큰 목소리를 내시는 이웃을 본 기억이 없고, 아이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이웃도 보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최귀희가 당시 보호하던 아동들을 어떻게 양육했는지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최귀희는 새벽마다 아동들이 잠들어 있던 숙소의 1층에서 기도를 했다. 기도는 항상 100여 명 아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그 아이들이 고쳐야 할 습관, 공부, 성격이 건강하고 바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숙소에서 매일 새벽마다 최귀희가 본인들이 어떻게 자라길 원하는지, 어떤 습관을 고쳐야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1980년 최귀희가 용신봉사상을 수상했을 때 장성한 이들이 잔치를 벌여 수상을 축하하며 “어머니가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잘못된 이들이 없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1970년대가 되면서 고아들의 수가 줄고 장애인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1979년 자유원을 심신장애자복지시설 ‘자유재활원’으로 전환하여 운영하였다. 고아들 가운데 심신장애인은 더 큰 아픔과 사회적인 냉대를 겪어야 했고, 특히 연고자가 없는 지적장애아동의 보호는 시급한 사회적 과제였다. 최귀희는 장애인들의 양육과 치료를 위해 80여 평의 시설에 물리치료실 등 치료시설을 설치하였고, 당시 장애인복지시설로서는 드물게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250평 규모의 직업훈련관을 마련하여 목공예, 수예, 이용과 같은 직업훈련서비스를 제공했다. 이후 1982년에는 대구선명학교를 설립하여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을 제공하였다.


○ 재소자의 어머니

해방 후, 신학공부를 했던 최귀희 부부는 북한 정부로부터 신변상의 위협을 받았다. 이로 인해 1947년 남하했고, 남편 故 강만승 목사가 대구형무소의 교목이 되면서 대구로 오게 되었다. 대구로 거처를 옮긴 최귀희는 1950년 대구 YWCA 실무 총무를 맡으면서 교도소 재소자 교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51년간 매주 대구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을 만나고 교정 봉사활동을 하였다.

최귀희는 특히 미전향 장기 복역수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는데, 그런 이유로 상당수 재소자가 출옥하면 자유원을 방문하였다. 최귀희는 방문한 이들에게 직업을 알선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결혼을 주선해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그들 중에는 최귀희의 질녀와 결혼을 한 이도 있었다. 최귀희가 얼마나 재소자들에게 인간적인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생전에 최귀희는 이 일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덕분인지 반공포로로 복역 중 최귀희의 전도로 출소 이후에는 장애인의 직업훈련 교육을 담당했던 이도 있다. 또 어린 시절 치기로 범죄를 저지르고 20년간 복역한 재소자는 출소 후 장애인 시설에서 시설물 관리를 하면서 남은 생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도 하였다.


○ 여성운동의 어머니

최귀희는 여성운동이라는 말조차 흔치 않던 시대에 인간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받기 어려웠던 많은 여성을 위해 1952년 대구에 대구여자기독교절제회(현 사회복지법인 대구여자기독교절제회)를 설립하였다. 대구여자기독교 절제회는 일제강점기 조만식 선생의 물산장려운동과 금주 금연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여성교육을 통해 여권을 신장하기 위해 노력한 단체였으며, 지금까지도 수성구 범어동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개선과 함께 가정보호사업, 교육사업, 사회봉사사업을 펼치고 있다.

최귀희의 본격적인 여성운동은 1947년 대구YWCA 활동과 함께한다. 대구YWCA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제9대, 제13대 회장을 역임하고, 1988년부터 는 명예이사로 60여 년을 함께 하였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사무실 하나 없던 YWCA를 위해 스스로 주축이 되어 대구YWCA 회관을 건립하였다. 1965년 남구 대명동 부지를 매입하기까지 10여 년을 부지 구입자금 모금에 노력하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마련된 건물은 현재까지도 대구여성인력개발센터로 여성의 일자리 창출과 고용을 촉진하는 교육의 장으로 역할하고 있다。

이처럼 대구YWCA 회관은 단순히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대구 여성운동의 정신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귀희는 오로지 기도와 헌신으로 회관 건립사업을 완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최귀희의 삶은 기도와 헌신 그 자체였다.
 

최귀희 원장이 1973년 10월 YWCA 창립 50주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귀희 원장이 1973년 10월 YWCA 창립 50주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호호 불어서 먹여주시고, 입 안을 하나하나 살피시던 어머니

최귀희는 그를 아는 많은 이들에게 평생 바쁜 삶을 살아 온 사람으로 기억된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책임감은 항상 여사를 종종걸음 치도록 만들었다. 어느 한순간도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었음에도 최귀희는 자신과 가족보다는 더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다. 시대를 앞선 신여성이며, 누구보다 헌신적인 사회사업가이자 열정적인 여성운동가였다. 그 어느 수식어를 붙여도 어색하거나 과하지 않은 삶을 산 최귀희를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것은 그가 사람을 대하는 자세 때문이다.

1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는 그 고단한 시절에도 최귀희는 뜨거운 우유를 먹일 때면 일일이 ‘호호~’ 불어 식혀서 아이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보급품으로 나온 비타민을 나눠줄 때도 그냥 나눠주지 않고 한 명 한 명 비타민을 삼키는지 살펴주었다는 것이 당시 자유원에서 생활한 이들의 증언이다. 자유원 원생이었던 이들은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먹인 것은 따뜻한 우유와 영양제였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성인이 되어 자립한 이후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최귀희는 명예와 성공이 아니라 사랑과 신념,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을 살고자 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생전 장남 강영신(현 아시아복지재단 이사장)에게 들려주었다는 말에서 고단했지만 그의 삶이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남이 잘못하면 용서해 주면 되고, 잘못했거든 용서를 빌면 된다. 하루에 한 번씩만 용서하고 사과하다 보면,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을 게다. 살아서 천국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는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없다.” 최 여사는 많은 이들이 살아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온몸으로 시대를 살아낸 사회복지 동역자의 표상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자리할 것이다.

 

사진 아시아복지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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