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부산에서 고아들의 ‘새로운 땅’을 연 ‘어머니’ 故 안음전

새들원 설립자 안음전(安音全)은 경남 마산에서 1905년 10월 23일, 아버지 안태명(安泰明)과 어머니 박성남(朴性南) 사이에서 외동딸로 출생하여 1985년 1월 3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안음전은 해방되던 해인 1945년 부산 대청동에 아동보호시설인 새들원을 설립한 이후, 세상과 이별한 1985년까지 40년 동안 부모가 없거나 잃은, 또는 부모에 의해 버림받은 영유아 및 아동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가 아동복지의 외길을 걸었던 여정은 그와 함께 생활했던 지인 및 새들원 관계자의 인터뷰, 새들원에서 제공한 자료와 그와 관련한 연구물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안음전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내용은 새들원 1회 졸업생인 김영애 님의 증언, 나영찬 새들원 원장의 증언 및 자료, 박지현(2009), 김기태 외(2002) 등의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故 안음전
 故 안음전

○ 독립만세를 부르던 여학생에서 아동보육 전문가로 거듭나다

안음전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안음전의 어머니는 기생들의 빨래와 삯바느질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고, 딸 안음전의 교육을 위해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 덕으로 1918년에 마산의신여학교초등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마산의신여학교는 초대 교장인 호주 선교사 맥피에 의해 1913년 설립되었으며,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학교였다. 1919년 전국에서 기미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15세의 안음전은 의신여학교 고등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안음전은 교사 박순천과 선배 최봉선의 영향을 받아 22명의 여학생들과 결사단을 조직하였다. 안음전은 지인들과 최봉선의 집에 모여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고, 마산 장날인 3월 21일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안음전은 1922년 3월에 마산의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그 해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여학교(廣島高等女學校) 5학년에 편입하여 1923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29년 3월에 동경 보육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보육학을 전공한 계기는 안타까운 개인사에서비롯되었다. 그는 마산의신여학교 2학년 시절, 급우와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급우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 가정교육이 덜 돼먹었다”고 하였고, 그 말을 들은 안음전은 너무나 가슴에 한이 맺혀 나중에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서른 명 쯤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이러한 안음전의 결심은 나중에 아동복지시설인 새들원을 설립하는 동기가 되었다.

안음전은 일본 동경 보육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국으로 돌아왔다. 1929년 4월부터 1934년 3월까지 마산에 있던 월영유치원에서 보모(保母)로 근무하였고, 1934년 4월부터 1938년 3월까지 양한나(梁漢拿)가 설립한 통영의 진명유치원에서 보모로 일을 하였다. 안음전은 국내 기관에서 자신의 역량을 계속 펼칠 수도 있었지만 아동복지에 뜻을 두었고, 또한 나라를 빼앗긴 국민으로서 시대적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사들의 유자녀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였다. 해방이 되자 안음전은 조국으로 돌아와 부산에 정착하였다.

 

○ 고아들의 새로운 땅, 새들원을 설립하다

해방 직후 부산에는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귀환동포 중에 아무런 생활대책이 없이 귀국하여 구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보금자리 없이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의 애처로움이 안음전의 눈에 들어 왔다. 그는 어느 날 부산역 대합실 구석에 있는 남루하고 눈만 큰 남자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만주에 서 미군에 의해 죽었고, 고국에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마저 잃은 고아였다. 안음전은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그 아이가 안음전이 보살핀 첫 번째 아이가 되었다.

이후 점점 보살피는 아이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안음전은 사재를 털어 우여곡절 끝에 적산(敵産)가옥을 구입하였다. 1945년 11월 1일, 중구 대청동 4가 797번지 국제
시장 옆에 아동복지시설인 ‘새들원’을 설립하였다. ‘새들’이란 이름에는 기독교의 가나안 복지(福地)에서 일컫는 ‘동녘의 뜰’, ‘동트는 뜰’, ‘새로운 땅(New Earth)’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신앙인이며 사회사업가인 안음전은 새들원을 통해 고아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하고자 했던 것이다.

새들원은 점점 고아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 대청동 원사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는데 안음전은 이를 대비하여 온천동에 새로운 원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대청동 원사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이 화재로 그동안의 새들원의 살림과 행정서류 등 자료가 불에 다 타버리는 등 많은 손실을 입었다. 1952년 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CCF), 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와 미군의 도움으로 원사를 지금의 위치인 동래구 온천2동 금정산 자락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

안음전은 새들원을 연 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 일을 무엇 때문에 시작하였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는 “내 대답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소년소녀, 고아인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비록 내가 하는 작은 봉사라도 우리 사회를 보다 좋게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라고 하였다.

부산역에서 아이들을 새들원으로 데려오던 트럭(1970)
부산역에서 아이들을 새들원으로 데려오던 트럭(1970)

 

○ 고난 속에도 굴하지 않고, 당차게 고아들의 어머니로 살다

안음전의 인생은 늘 험난한 고비에 서 있었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당한 모욕을 견뎌야 했고, 유학시절에 앓은 폐결핵으로 인해 등이 굽는 등 신체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한 번도 대중목욕탕에 가지 못했다. 안음전은 가정을 두 번이나 꾸렸지만 결국 혼자 남게 되는 등 이러한 인생의 굴곡은 오히려 안음전으로 하여금 새들원의 원아들에게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새들원을 만들고 난 뒤 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리느라 안음전은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뛰어다녔다. 그 사이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전쟁의 소용돌이로 고아가 되고 집을 잃었다. 전쟁고아들로 인해 새들원은 수용인원보다 약 10배로 늘어나 심각한 식량부족을 맞게 되고, 아이들에게 제대로 음식을 줄 수 없어서 안음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안음전 개인의 능력으로는 운영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우연한 기회에 CCF의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1951년 3월 21일 CCF에 가입하여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CCF의 원조는 그가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986년 3월 31일까지 지속되었다. 그 덕에 정부보조금이 없던 상황에도 CCF 미국본부로부터 지원되는 아동 1인당 10달러의 후원금으로 새들원의 살림은 크게 나아지게 되었다.

또한 1952년 5월 안음전은 하와이 노인회의 초청을 받았다. 하와이에 도착 후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계속 모금 강연을 통해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안음전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면서도 260명의 아이들을 돌보는데 있어서 문제가 없는 날이 없었지만 행복하게 웃고 노래 부르는 새들(원생들)을 보며, 그들의 엄마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다”고 회고했다.

 

○ 현 한국사회복지협의회의 창립대회를 이끌어 내다

안음전은 1952년 2월 15일에 당시 사회부와 공동 주관하여 ‘전국사회사업가대회’를 발족시킴으로써 사회복지시설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현 한국사회복지협의회와 한국아동복지시설협회가 부산 새들원에서 창립을 한 의미 있는 시설이 되었다.

안음전은 새들원의 원장으로서 소임을 다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복지에서도 큰 역량을 발휘했다. 1948년에는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 부지사장을,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부산 YWCA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에는 부산아동자선병원 이사를 지냈고, 1970년부터 1971년까지 CCF 한국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사회복지의 지평을 넓혔다. 새들원의 자립화에도 애를 썼던 안음전은 CCF의 원조가 감축·중단되는 상황에 대비하여 젖소 사육과 텃밭 경영 등 자체 수익 사업을 시작했고, 1978년에는 대청동 부지를 수익 사업용으로 대체 허가를 받아 그 자리에 새들맨션을 지었다. 이 건물의 임대 수익은 새들원의 운영 자금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새들원은 전국의 아동보육시설 중 가장 자립도가 높은 시설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안음전은 원생들이 18세가 되면 새들원을 떠나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에 대한 준비를 위해 직업교육과 사회 적응 훈련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1958년에 육아 시설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 평가받는 ‘소숙사 제도(cottage system)’를 도입하였다. 이는 1963년 이 모델을 실시했던 한국 SOS어린이마을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서 시행한 선구적인 시도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안음전은 평소에 “자기 자식이 있는 사람은 보육원을 운영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현재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사유화 인식이 운영권 승계 및 재산권 방어 인식 강화로 이어져 사회복지법인의 폐쇄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사회복지영역에 대한 개방성과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안음전의 말은 지금도 그 울림이 매우 크다.

 

▶참고문헌

• 김기태 외(2002). 「부산 사회복지 50년사」. 부산광역시사회복지협의회
• 김기태 외(2007). 「부산 사회복지의 역사와 토착화」. 경기도: 공동체
• 박지현(2009). “Ⅴ. 해방이후여성인물 1. 사회ㆍ교육 분야 - 새 땅의 참 주인, 안음전”. 하정화·이훈상·이송희·이진옥·박지현·손숙경 편.
「부산여성사Ⅰ 근현대 속의 부산 여성과 여성상」 pp. 268-279. 부산여성가족개발원
• 안음전(1971). “머리글: 제1회 자선바자를 마련하면서”. 「동광」.기독교아동복리회(CCF) 한국연합회
• 국제신문(1994. 4. 23), “부산 현대인물 탐구 - 이 사람의 삶<7> 사회사업가 안음전”, 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19940423.01027081402 (검색일. 2023. 6. 10)
• 아시아뉴스통신(2019. 3. 30). “창원시, 근대교육으로 민족의식에 눈 뜬 여성 여성독립운동가, 의신여학교와 최봉선·안음전·양한나·김두석”.www.anewsa.com/detail.php?number=1645522 (검색일. 2023. 6. 10).
• 김영애(2023. 7. 17-19.)와 인터뷰. 새들원 1회 졸업생.
• 나영찬(2023. 7. 17.)과 인터뷰. 현 새들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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