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정신요양원 설립자 양한나(梁漢拏)
자매정신요양원 설립자 양한나(梁漢拏)

자매정신요양원 설립자 양한나(梁漢拏)는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1893년 3월 3일, 양덕유(梁德有)와 한영신(韓永信)의 1남 10녀 중 셋째 딸로 출생하여 1976년 6월 26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45세에 김우영(金雨英)과 만혼을 하였으나 7년 만에 사별했다. 양한나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살았으며, 해방 후에는 여성운동과 사회복지운동의 터전인 자매여숙(현 자매정신요양원)을 설립하여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정신장애를 가진 여성들과 함께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다.

 

기독교 개화사상에서 항일정신을 키우다

양한나의 부모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신앙이 깊었으며, 집안의 분위기는 근대적 문물에 매우 개방적이었다. 또한 부친 양덕유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딸인 양한나를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면서 양한나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돌아와 기독교 학교인 일신여학교 고등과에서 공부했다. 1913년에 졸업하였는데, 이 학교가 배출한 제1회 졸업생 4명 중 한 사람이었다. 양한나는 일신여학교의 교육을 통해 개화에 눈을 뜨고 일생동안 독립운동 및 여성과 사회를 위해 활동할 수 있던 자양분을 키웠다.

양한나는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직후 마산에 있는 의신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의신학교는 호주 선교회가 설립한 근대적인 여성교육기관이었으며, 반일적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학교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양한나의 항일의식은 의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드러났다. 1915년, 학교에서 일본 국왕의 즉위식을 기념하는 떡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하자, 양한나는 “아이들아, 우리가 이 떡을 받아먹는 게 말이나 되느냐” 하면서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양한나는 일본 경찰이 항상 주목하는 요주의 인물로 분류 됐고, 더 이상 교편을 잡기 어려워졌다.

양한나는 1917년 무렵 의신학교를 사직하고,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진학했다. 이미 민족의 독립에 눈을 뜬 양한나는 일본에서도 학교 공부만 하지 않았다. 일본이 강제로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족 출신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추진하자, 동경여자학원 학생인 김마리아 등 동지들과 반대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 형사들이 반대운동 기미를 알고 방해하면서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도산 안창호를 만나 ‘한나’라는 이름을 얻고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양한나는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이후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안창호를 만났다. 당시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과 노동국 총판을 맡고 있었다. 안창호는 주체적 인격체로서 여성의 자각과 독립운동에 대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강조했다. 이러한 안창호와의 만남은 양한나를 크게 고무시켰으며 양한나에게 평생의 나침반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후 양한나는 양친 부모와 함께 안창호를 평생토록 마음의 어버이로 여겼다.

양한나는 원래 양귀념(梁貴念)이라는 본명이 있었다. 이후 호적 이름인 ‘한나’라는 이름은 안창호가 지어 준 것이다. 안창호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억척같은 추진력을 보이는 양한나에게 한라산 같은 굳은 의지를 지닌 사람이 되고, 백두산에서 한라까지 내 나라를 길이 보존하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한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양한나는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국내에 임시정부 조달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밀입국하기도 했다. 1922년, 임시정부 특사로 귀국하던 양한나는 도중에 체포되었으나 학생이라는 신분과 끝까지 버티는 담력으로 무사히 석방되었다. 이처럼 양한나는 수 년 동안 여러 차례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동했다. 이런 와중에 일본 경찰에 일시 구속된 경우도 있으나 정식으로 기소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시국 사건이 있을 때마다 불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여성 계몽 운동과 유아교육에 힘 쏟다

1921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선에 들어온 양한나는 부산지역 여성들을 계몽시키고자 부산여자청년회를 설립하면서 부산지역 여성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부산여자청년회는 야학에 주력했다.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서 각종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했다. 부산여자청년회는 여성을 포함한 지역민을 계몽하고, 여성들로 하여금 자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여자청년회의 회장이었던 양한나는 부회장 김기숙 등과 같이 야학을 운영하였는데, 학생 수는 70명 정도로 호응이 컸다. 양한나는 부산여자청년회 활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1921년 10월 20일 다시 중국 쑤저우(소주)로 떠났다.

1922년, 임시정부의 연통제가 와해되면서 임시정부활동도 위축되었다. 양한나는 임시정부 관련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였고, 다시 부산여자청년회 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야학 활동의 성과로 1922년 6월에는 야학생이 100여 명에 이르렀고, 1923년에는 일신여학교 청년회의 총무를 맡아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유치사범과를 졸업하고, 이후 정동 이화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활동했다. 이듬해 1926년에는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1928년에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 하기수양단을 조직했다. 유학 이후 자신의 활동을 보육사업에 집중했다. 1929년에는 초량교회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일하였으며, 1935년경에는 사회사업 관계로 호주를 시찰했다. 부산 초량에서 3.1유치원을, 통영에서 진명유치원을 운영했다.


해방이 되면서 양한나는 한국애국부인회의 초대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이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는데 양한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양한나는 정치적인 단체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한편, 1946년에 양한나는 미 군정하에서 초대 수도 여자경찰서장에 취임했다. 당시 민간단체들은 공창폐지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공창제 하에서 사창 또한 성행하고 있었고, 이는 주택가에까지 번져나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양한나 역시 경찰서장으로서 비인도적인 공창을 폐지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한나는 소외된 여성들에게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창기 출신 여성들의 살길을 크게 염려하였고, 이것이 자매여숙을 설립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기도 했다. 공창제도는 1947년 11월 14일 법령 제7호로 폐지되었다.

이후 양한나의 활동은 사회복지사업과 YWCA의 지역 조직을 건설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일제시기부터 오랫동안 YWCA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양한나는 부산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산 YWCA를 조직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46년 7월 1일 부산 YWCA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초창기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는 계몽운동을 중요사업으로 전개했다. 중점 사업으로 1948년부터 농예사업을 중앙회로부터 위임받아 농촌부녀자들에게 농업, 축산, 원예 등의 기술을 교육했다. 양한나는 1948년 7월 회장직을 안음전에게 물려 주고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를 떠났다.

 

정신장애여성들을 위해 자매여숙을 설립하여 남은 일생을 바치다

1953년 경, 초창기의 자매여숙(부산 사하구 괴정동 428번지)
1953년 경, 초창기의 자매여숙(부산 사하구 괴정동 428번지)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를 떠난 이후, 양한나는 여성단체 활동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1976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아와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복지사업에만 전념했다. 1946년, 서구 아미동에서 오갈 데 없는 고아 55명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재단법인 부산자매여숙이라는 아동보호시설(고아원)을 설립했다. 이것이 후일 부산 최초의 여성정신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인 자매여숙(姉妹女塾)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부산에서는 전쟁고아들과 월남한 여성들의 생계형 윤락행위가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평소 어린이와 여성 문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양한나는 거리를 가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보면 데리고 왔다. 점차 인원이 늘어나게 되면서 1952년, 정식으로 자매여숙을 설립했다.

양한나는 전쟁고아 중에 정신장애 아동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리에서 아이를 낳거나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많은 여성 정신장애인을 보게 되었다.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든 ‘금달네 사건’이 있었다. 금달네는 정신장애 여성이었는데, 광복동 대로에서 헐벗은 채 뭇남성의 희롱 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양한나는 즉석에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금달네를 감싸 시발택시에 태워 자매여숙으로 데려 왔다. 이 금달네 이야기는 당시 부산 시내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에게 양한나의 활동이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1952년 원생시설인 부산자매여숙으로 인가받고, 1953년에는 자매여숙 시설을 서구 괴정동으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여성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보호사업을 시작했다. 1957년에는 괴정동에 자매불구원 시설을 건립했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미 육군의 도움으로 병실등 시설을 확장했다. 양한나는 1963년에 재단법인 자매여숙의 제3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1966년까지 3년의 임기를 마쳤다. 1975년 7월, 아동복리시설을 폐지하고 이때부터 자매여숙은 여성전용 정신요양시설로 전환했다. 이렇게 정신장애여성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고 이듬해 1976년, 양한나는 노환으로 별세했다. 30년 동안 고아와 정신장애여성의 복지를 위해 외길을 걸었던 양한나의 삶을 추모하기 위해 사회복지시설연합회장(葬)으로 장례를 지냈다.

양한나는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들과 정신장애여성들을 위해 내어 놓았다. 정작 자신은 항상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하였으며, 주위에서 치마를 입은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매여숙의 일에 열심이었다. 별세하기 전, 노환으로 병원에 있던 양한나는 전쟁고아를 위해 자매여숙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보살피고, 거리를 떠돌던 정신장애 여성을 수용하여 치료한 공으로 국민훈장동백장을 받았다. 또한 2003년에는 부산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었다. 양한나는 독립운동가로, 여성운동가로, 그리고 사회복지사업가로 평생을 불꽃처럼 뜨겁게 살았던 대장부였다.

1950년대 자매여숙 원생들의 모습
1950년대 자매여숙 원생들의 모습

 

이 글은 자매정신요양원 문숙희 원장과의 인터뷰(2023. 12. 29), 강대민 외(2004)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Ⅰ)」, 윤석환 외(2017)「자매여숙·자매정신요양원 70년사」, 하정화 외(2010) 「부산여성사Ⅰ근현대 속의 부산 여성과 여성상」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사진 사회복지법인 자매정신요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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