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서서평 선교사

故 서서평 선교사
故 서서평 선교사

○ 뉴욕에서 시작된 선교사의 꿈, 조선에서 펼치다

한일장신대학교를 창설한 서서평(徐徐平) 선교사는 1912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1934년 6월 26일 별세할 때까지 22년간 한센병자와 고아, 과부 등을 섬기고 그들이 전도부인과 사회사업가 등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한 인물이다.

서서평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zabeth Johanna Shepping)의 한국 이름이다.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안나 쉐핑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가 세 살 때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가톨릭 신자인 조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889년에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1901년 뉴욕 성마가병원(St. mark’s hospital) 간호학교를 졸업했고, 뉴욕시립병원에서 간호사 실습을 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뉴욕시 유대인 결핵요양소와 이탈리아 이민자수용소에서 일하면서 8년 동안 성서교사 훈련학교(현재 뉴욕신학교)를 다녔다. 32살이었던 1912년 2월 20일에 미국 남장로교 조선의료선교사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코리아호를 타고, 3월 19일 조선 땅에 발을 딛었다. 이후 광주로 이동해 언어와 풍습을 익히면서 조선 사람처럼 살고자 했다.

 

○ 광주제중원에서 만난 평생의 동역자, 로버트 윌슨

서서평은 광주제중원에서 평생의 동역자인 로버트 윌슨(R. Wilson, 한국명 우월순·1880~1963) 원장, 최흥종(1980~1966) 목사(당시 조사)를 만났다. 동갑내기였던 세 사람은 의사, 간호사, 목회자로서 힘을 합쳤다. 광주제중원은 1904년 12월 25일에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배유지 목사의 임시사택에서 첫 예배를 드린 남장로교 광주선교부가 세운 진료소였다. 1905년 11월 20일에 초대 원장 놀란(J. Nolan) 선교사가 정식 개원하였고, 1908년 5월에 2대 원장 윌슨이 1926년까지 재직하며 발전시켰다. 1911년 미국인 그레이엄 씨가 딸(Ellen Levine Graham)을 기리기 위해 기부한 7000달러로 현대식 건물(지하 1층, 지상 2층)을 신축해 ‘엘린러빈그레이엄기념병원’을 설립했다.

광주제중원은 1909년 4월, 급성 폐렴에 걸린 오웬(C. Owen·1867~1909)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 있던 포사이드(W. Forsythe) 선교사가 광주로 오는 길에 한센병 여인을 말에 태우고 와서 치료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제중원 건너 지한면 봉선리(현 봉선동)에 나환자촌이 생겼다. 광주제중원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극동한센병협회의 후원금 2000달러로 1911년 4월 25일에 ‘E’자형 나병진료소(이후 광주나병원)를 짓고 나환자 19명을 수용하였다. 이 협회의 지원을 받아 1912년 11월 15일에 나환자촌 낙성식도 가졌다.

서서평 선교사가 광주제중원에 온 것은 윌슨 원장이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간호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요청에서 비롯되었다. 손발이 짓무른 상처로 퉁퉁 부었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와 고름으로 엉켜 웅크리고 있는 나환자 600여 명을 치료하는 것은 서서평 간호사의 임무였다. 자신의 땅 1000평에 나병진료소 등을 짓도록 후원한 최흥종 목사의 역할도 컸다. 나병진료소는 병원이자 학교였으며, 주일에는 교회로 활용되었다. 광주나병원은 1926년에 전남 여천군(현재 여수시)으로 이전하면서 명칭 또한 애양원으로 바뀌었다.

 

○ 서양식 간호사 양성 노력과 조선간호부회 창설

서서평은 1915년부터 간호 인력 양성을 사명으로 여겼다. 광주제중원, 군산구암예수병원(1916), 경성세브란스 병원(1917~1919) 등에서 활동했고, 세브란스간호사훈련학교에서 간호 인력을 키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흥인지문 밖 보구여관(현 이화여자대학교병원)에서 서양식 간호부(간호사)를 양성하고,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조선간호부회를 창립(1923년 5월 12일)한 지 6년 만에 국제간호협의회(ICN, International Council of Nurses) 준회원으로 입회시켰다. 1929년 7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6차 총회에 이효경, 이금전, 서서평 3인이 대표로 참석하여 ICN 회원 가입을 신청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 호남 최초 사회복지학과의 뿌리가 된 이일성경학교를 열다

3·1운동에 참가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최흥종을 면회한 것을 빌미로 일제가 서서평에게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올가미를 씌워 서울에 거주할 수 없게 하자 그는 광주제중원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시기부터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고, 전도부인 등을 양성하여 선교를 체계화시켰다. 1년에 백여 일을 조랑말을 타거나 봇짐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선교하고 이들을 지도자로 양성하였다.

그는 1922년 6월 2일에 사재를 털어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bible woman) 양성학교를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친구 로이스 닐(Lois Neel)이 준 후원금으로 붉은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고, ‘이일성경학교(Neel Bible School)’ 혹은 ‘광주이일학교’라 불렀다. 이 학교는 정부가 공식 인정한 3년제 사립학교였다.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아동들, 소박맞은 여인들,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 불우하고 기회를 놓친 다양한 계층의 여인들이 입학하였다.한글을 배우는 보통과와 성경공부를 하는 성경과로 구성되었다. 그는 평소 광주에서 확장주일학교를 통해 선교하고, 농한기에는 전남에 있는 교회를 두루 돌아다니며 성경을 가르치면서 부인회를 조직했다. 1922년 10월에 광주금정교회에서 부인조력회를 창립하고, 이를 전남노회와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의 모체이다.

서서평 사후 유화례(F. Root, 1893~1995)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이일성경학교는 1940년에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가 1948년 9월에 복교됐다. 1961년에는 전주에 있는 한예정신학원과 통합하면서 전주한일여자신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로 개편하였고, 1981년에 호남지역 최초로 사회복지학과를 개설하여 지금까지 3000여 명의 사회복지사를 양성하였다.

1932년 이일학교에서 열린 서서평 선교 20주년 기념식 사진과 당시 만들어진 기념비(출처 : 한일장신대학교 홈페이지)
1932년 이일학교에서 열린 서서평 선교 20주년 기념식 사진과 당시 만들어진 기념비(출처 : 한일장신대학교 홈페이지)

 

○ 사회사업가 양성에도 중추적 역할

그는 무의탁자 돌봄 간호, 극빈자와 병자 및 노인 돌봄, 모자 보건 간호, 긴급 구조 등 공중위생 사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당시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이었지만 그는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다. 버려졌던 여자아이 13명과 남자아이 1명을 데려다 자녀로 키웠고,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거나 오갈 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 보살폈다.

서서평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라고 물으며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그의 헌신적인 삶과 사회사업활동은 이일학교를 졸업한 전도부인과 양자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큰딸 곽애례는 평양신학교를 다녔고, 막내딸 이홍효는 전북 고창과 계명여사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전서노회의 여전도회장을 역임하였다. 전남노회 최초 여전도사 김화남은 1938년 4월에 양림동 53번지에서 ‘전남성노원’을 개원하였다. 전도부인들 중 독신자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는데 이를 모태로 1960년 11월에 이일성로원(이정희 원장)이 설립되었다. 홍승애는 1968년에 정신폐질환자를 요양하는 ‘사랑의집’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은성원으로 이어졌다. 이현필이 세운 동광원은 서서평의 제자인 오복희의 활동무대였다.

또한 서서평은 1920년 광주YMCA의 창설을 주도한 최흥종 목사, 1922년 광주YWCA와 조선YWCA를 창설한 김필례 선생과 긴밀히 협력하였다.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조아라는 이일학교 교사로 일하고, 공창제도 폐지운동 등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독신전도단으로 활동한 강순명 목사는 천혜경로원, 이현필 선생은 동광원, 이현필 선생 제자들은 귀일원, 무등원을 설립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호남지역에서 사회사업을 한 인물은 대부분 서서평, 최흥종, 윌슨 등과 연결되었다.

 

○ 섬김으로 성공한 삶을 살다

조선에서 22년간 온몸으로 베풀고 1934년 6월 26일 영양실조로 55년의 생을 마친 서서평이 남긴 것은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 한 장뿐이었다. 시신까지 의료 연구용으로 제공하고 떠난 그의 침대 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e)”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장례식 때는 13명의 양딸과 수백 명의 걸인, 나환자들이 행렬을 뒤따르며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통곡하였다. 7월 7일에는 오웬기념각에서 범시민추도식이 열렸다. 현재 그는 양림동의 선교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서서평은 선교사이면서 간호사교육자, 나환자와 고아의 어머니, 여성운동가, 여성신학교 창설자, 사회사업가로 활동하였다. 섬김을 통해 성공한 삶을 산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2012년에 ‘서서평 내한 100주년 행사와 평전 출판 기념예배’가 열렸고, 2017년에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란 영화로 제작되는 등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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