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들의 ‘아버지’로서 살고 싶었던 복지선구자 故 사태현(1908~2003)

설원복지재단을 설립한 사태현 장로와 부인 김애월 권사
설원복지재단을 설립한 사태현 장로와 부인 김애월 권사

아동양육시설 안양의집(구 안양보육원)과 안양노인전문요양원이 속한 사회복지법인 설원복지재단을 설립한 고사태현(史泰鉉)은 1908년 이천에서 출생하여 2003년 9월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08년이라는 그의 출생년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의 굴곡진 근현대사와 함께 걸어온 그의 일생은 경기도 이천에서 출발하여 북간도를 거쳐 해방 후 경기도 안양에서 마치게 된다.

95세라는 삶의 여정 가운데 그는 북간도 동불사에서 야학을 세우고, 1945년에는 북간도 용정 조양천에 근명여자중학교를 설립, 해방 후 1947년에는 현재 안양의집이 있는 안양시 석수동에 안양보육원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아동양육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 근명초중학교, 원예기술학교, 근명여자상업고등학교, 성원교회 등을 설립하는 등 사회복지와 아동양육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그의 땀과 노력, 눈물의 결정체로 일구어 놓은 안양의집에 적을 두었던 약 2500명(사태현 원장 시절, 1984년 기준)에 달하는 원생들은 지금도 그를 둘도 없는 ‘아버지’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업적에 비해 그의 이름 석 자는 거의 무명에 가까울 정도로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는 그의 손녀이자 설원복지재단 이사장인 이정혜(李汀蕙)와의 인터뷰와 그의 유고 시선(詩選), 자필로 남긴 메모와 사료 등을 참고해 그의 열정 깊은 여정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 한다.

 

○ 문학청년 설원(雪原)과 머나먼 땅 북간도 용정

사태현은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나이 13세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부인 김애월(金涯越)과 함께 고향 이천을 떠나 북간도 용정 동불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독서와 시 쓰기를 좋아해 고향의 서당에서 백일장 장원을 도맡아 할 정도였던 그는 북간도의 눈덮힌 평원을 뜻하는 ‘설원(雪原)’이라는 호로 ‘간도일보(間島日報)’에 시를 기고하면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타관에서의 서러움을 달래었다. 조국 잃은 청춘의 탄식을 읊은 ‘님’이라는 제목의 시는 그가 ‘간도일보’에 처음으로 발표하였던 시로 그리움과 울분에 찬 문학청년 사태현의 심경이 짙게 배어난다.

“남쪽나라 내 고향 땅, 거기 친구들 산천들, 그 잔디밭 그 솔밭 그 들판. 님이여 남국에 계신 님이여, 불어오는 저 바람소리 사납다 하나이까, 나의 쉬는 이 한숨을 들어들 보소. 가슴 터져 나오는 소리, 이 바람소리만 못하 오릿가. 조국 잃은 청춘의 탄식소리.”

그는 역마차를 타고 영하 40도의 하얼빈을 달리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쓰러트린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떠올렸고, 1930년 김좌진 장군의 장례식에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만사(輓詞,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직접 써서 보낼 정도로 그에게 조국 잃은 설움은 컸다. 그 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는지 간도 땅 동불사에 야학을 세워 남포 불빛에 의지해 아이들과 부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후학을 양성하며 문맹 퇴치에 힘썼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진 이후 동불사를 떠나 조양천으로 가게 되었고, 이후 ‘만학일보(滿學日報)’ 편집장을 그만둔 후 법무사 사무소를 하던 1940년대 초 폐결핵 진단을 받게 된다. 사망선고와 같은 진단이었지만 이것은 도리어 그의 일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사태현은 요양차 북간도를 떠나 함경선을 타고 동해안 어느 시골에서, 경기도 여주 이포나루터의 어느 산사에서, 그리고 서울 동대문 휘경동의 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 등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의 간절한 기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기독교의 박애정신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게 된다.

 

○ ‘어버이를 대신한 어버이’로 살다

해방 이후 사태현은 아내, 아들, 딸과 함께, 때로는 흩어져 생사를 넘나들면서 두만강과 삼팔선을 넘어 고향 이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먼저 일제강점기에 남의 손에 넘어갔던 땅을 되찾고, 그 땅을 기반으로 안양 석수동 골짜기의 밤나무꽃이 활짝 핀 약 4만 평의 터에 막사를 짓고 꽃과 나무를 심으며 1947년 6월 안양보육원을 시작했다.처음에는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서 과부가 된 어르신 몇 분과 부랑아 몇 명, 시각장애인 소녀 등 십여 명이 함께 지냈다. 비록 소규모였지만 양로원, 보육원, 장애인시설을 합한 복합 시설로 오늘날의 그룹홈과 같은 면모를 가지고 출발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일시에 고아가 된 소년과 소녀들이 안양에 주둔해 있는 미군부대의 군용트럭에 실려 몰려들었고, 그 결과 안양보육원은 그룹홈이 아닌 약 400명의 전재(戰災)고아가 함께 사는 대규모 시설이 되었다.

사태현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어버이를 대신한 어버이’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대식구가 먹을 식량과 살 집을 지을 건축자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그의 부인 김애월은 조금 나이 든 원생들과 함께 밥 짓고 빨래하며 텃밭을 일궈 의식주를 해결했다. 사태현은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재정난 속에서도 원생들의 교육을 잊지 않았다. 교사 출신 피난민과 함께 원생들의 학교 교육을 논의했고,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과 딸, 그들의 친구들은 자원하여 음악, 무용, 문학, 연극지도 등에 앞장섰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재능기부 자원봉사의 원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사회복지의 불모지에서 ‘낙원’을 꿈꾸다

기독교아동복리회(CCF, Christian Children's Fund)는 1938년 미국에서 시작된 비영리 구호단체로 한국에 대한 지원은 1948년부터 시작하였다. 1953년 당시 학업을 위해 부산에 머물고 있던 사태현의 딸 사지숙(史址肅)은 부산에 본부가 있던 한국 CCF 사무소를 몇 번이나 찾아가 안양보육원의 CCF 회원시설 가입을 신청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것을 계기로 안양보육원은 1985년 정부의 보조금 지원이 있기까지 미국의 구호물자와 CCF의 후원으로 굶주림과 헐벗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사태현은 유독 감투 노릇이나 횡포, 권력 다툼을 싫어했다. 그는 일화에서 원생 중에 한 학생이 웅변대회를 나가서 열심히 연습했음에도 낙선한 일을 적고 있다. 그는 낙선의 원인을 웅변의 내용에서 찾고 있다. 즉, “정부, 관의 부패상을 내려 까는 내용이었고, 그 때문에 소위 의분감, 정의를 내세우는 우를 잘 범해서 미움을 샀다”고 낙선한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고, “내 빽은 정의이고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며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고 안양보육원의 밝은 미래를 설계했다. 그가 꿈꾼 안양보육원의 미래는 그의 시 ‘꽃 동산’에서 엿볼 수 있다.

“아주 맘에 드는 꽃 동산을 하나 꾸며 놓고 가야지. 아주 멋진! 아주 멋진! 꽃 동산을! 사시 장철 꽃이 피고 밤낮 없이 새가 울고 찔레꽃 향기 그윽한 동산 뻐꾹새가 울어주고 달 밝은 가을밤엔 접동새가 밤을 새워 울어주는 옛 얘기 같은 동산을 꾸며 놓고 가야지. 學生들이 모여 들고 스승들이 드나들고 학술을 연마하고 진리를 탐구하고 香爐가 피어오르고 人間이 改造되고 용서와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동산, 사랑의 노래소리, 참회의 기도소리 그치지 않는 낙원을 꾸며 놓고 가야지.”

그는 하나님을 ‘빽’으로 사회복지의 불모지에서 낙원을 꿈꾸고 있었고, 안양보육원은 바로 그가 꿈꾼 낙원이었다. 

 

사태현 장로의 시 ‘꽃 동산’ 육필
사태현 장로의 시 ‘꽃 동산’ 육필

 

○ 꿈이 현실이 된 안양보육원

사태현의 평생의 결실은 지난 70여 년간의 안양의집(구 안양보육원)이 걸어온 흔적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2010년 안양의집 소식지에는 원생 가운데 대학생의 입학과 졸업 현황이 나와 있다. 소식지에 따르면 2010년 10월 현재 대학교 재학은 16명, 대학교 졸업(1999~2010.11)은 19명이다. 사태현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원생에게는 땅을 팔아서라도 등록금을 지원하였고, 그 결과 국가장학금 제도가 생기기 전이었음에도 한 해에 3~4명은 대학을 졸업시켰다. 이들은 이후 목사, 교수, 교사, 시인, 고위 공무원, 대기업 직원 등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지원정책이나 보호기간 연장 제도가 없었던 시절, 만 18세로 보호가 종료되었지만 자립 준비가 안 된 원생은 준비가 될 때까지 계속 시설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재능기부 자원봉사자들도 찾아와 학습지도는 물론 태권도,음악, 미술, 댄스, 연극, 바둑, 외국어 등을 지도해 주었고, 관악단을 운영했으며, 원생 중에는 유명 콩쿨에서 입상하여 음대 졸업 후 유학도 가고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는 단원도 배출되었다.

1950년대부터 활동한 안양보육원관악단
1950년대부터 활동한 안양보육원관악단

 

안양의집에서 배출된 원생들은 ‘코스모스회’를 만들어 명절 때면 가족을 동반해 안양의집을 방문하곤 했다. 그중 어떤 이는 사태현의 손을 만지며 울기도 하고, 어떤 이는 술주정을 하기도 하였다, 사태현은 그토록 바라던 ‘아버지’로 그들을 어루만지며 평생을 살다 간 것이다. 그가 꿈꾸던 대로 안양의집은 낙원이 되었고 꽃동산이 되어 학생이 모여들고 스승이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안양의집과 그 식구들을 섬기고자 한 사태현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 앞에 정직하자, 맡겨진 생명들을 향하여 성실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안양의집의 운영 목표였고 원훈(院訓)이었다. 그가 실천한 ‘정직, 성실, 사랑’은 지금도 안양의집의 원훈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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