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병문 우성재단 이사장

故 최병문 우성재단 이사장(제공=사회복지법인 우성원)
故 최병문 우성재단 이사장(제공=사회복지법인 우성원)

우성재단 설립자 최병문(崔秉文)은 청각과 언어, 정신발달 및 정서적 장애를 가진 아동이 일반 학교와 사회에 복귀하여 통합될 수 있도록 한국 최초의 구화교육기관 ‘한국구화학교’를 설립하여 말과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능력을 개발·교육하는 데 힘썼다. 더 나아가 이 땅의 모든 중증·중복 장애인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거주시설인 ‘우성원’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그 토대를 놓았다.

최병문은 1922년 4월 평안남도 대동군 금정면에서 출생하였다. 1962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구화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사회복지법인 우성재단 산하의 우성원 원장으로 재직하였고,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사회복지법인 우성재단 이사장으로서 장애인복지 발전에 이바지하던 중 2007년 4월 18일 소천하였다.

최병문은 자신의 인생을 장애인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 채웠던 한국의 특수교육과 장애인복지실천의 선구자였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훈장과 대통령표창을 비롯해 서울교육상, 서울시민대상, 백강봉사상 등을 수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세계적으로도 ‘장애인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국내외 장애인 교육과 복지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민족적 고난의 시기였던 일제강점기였다. 그 엄혹한 시절, 최병문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문맹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당시 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홀(Hall) 여사가 운영하던 평양맹아학교에서 농 아동의 교육방법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왜 농인들이 말할 수 없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것이 구화교육을 연구하고 실행하게 된 동기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그는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의 한 맺힌 아픔을 미래 세대가 또 다시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청각장애 아동들이 우리말을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도록 가르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이후 그는 실제로 한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특수교육 이념과 장애인복지실천의 비전을 추구하였고, 이에 더하여 민족의 자존과 자주 독립의 정신을 이어받아 마침내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한국형 특수교육과 장애인 복지의 혁신적 체계와 방법론을 창안·보급하였다.

 

○ 한국 최초의 공립 특수학교 제주맹아학교 세워 구화교육 기틀잡다

최병문은 한국전쟁의 북새통 속에 미처 피신하지 못한 서울맹아학교 기숙사생 22명을 데리고 인천항을 통해 제주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 국립맹아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였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정광사, 제주북초등학교 등지에서 서울맹아학교 분교를 운영하며 특수교육을 개척하였다. 서울맹아학교 제주분교로 인가받아 특수아동들을 교육하기 시작하며 제주맹아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공립 특수학교였다. 이렇게 최병문은 청각장애학생들에게 구화교육을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했으며, 교사들에게는 구화교육의 방법론을 연수받게 하여 구화교육의 기반을 점차 확대해 갔다. 그러나 최병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 속 겨우 기능을 유지하던 공립학교에서의 구화교육 수행에 한계를 느끼던 중, 결국 사립 농아유치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954년에 서울로 올라온 최병문은 마포구 구수동 120평(약 400㎡)의 야산을 구입하였다. 이후 매년 조금씩 땅을 넓혀 양계장을 짓는 것으로 한국구화학교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닭과 계란을 팔았고, 밤에는 구화교육 연구에 매진하며 서울시 교육위원회의 농아 발성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특수교육자들과 뜻을 모아 한국특수교육협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공병우 박사의 후원으로 ‘특수교육’(발행인 최병문)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하였다. 이밖에도 교육부(당시 문교부)의 지원으로 중앙교육연구원에서 전국 특수교육 교사연수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던 중 최병문은 말하는 농 아동과 지적장애 아동의 자립역량 강화를 지향하는 특수교육 수행을 위해 양계장을 헐고 교실을 신축했다. 1962년 당시 함께한 아이들은 13명, ‘한국구화학교’의 시작이었으며, 한국 최초였다.

 

○ 한국구화학교의 시작, ‘농아도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구화학교만의 특성은 “농아도 말할 수 있다”는 최병문의 확고한 교육이념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말을 못하던 사람도 언어재활치료가 포함된 구화교육을 통해 우리말을 배우고, 비장애인과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청각장애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우리말로 익힐 수 없는 것은 장애로 인한 또 하나의 사회적 장벽이며, 이를 가로막을 수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특수교육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청각장애 아동에게 우리 말을 잘 익혀 비장애인과 완전 통합할 수 있는 구화교육의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 자체가 사회적 차별이고 배제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구화교육이란 농 아동이 보청기나 인공와우 수술로 듣는 힘을 보충하고, 입술 움직임과 얼굴 표정으로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하게 하고, 발성과 발어 훈련을 통해 음성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법이었다. 최병문에게 있어서 특수교육은 곧 구화교육이었다. 구화교육을 통해 장애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비장애인과 완전히 통합하여 정상화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최병문은 청각장애인이든, 지적장애인이든, 자폐성장애인이든 장애의 유형을 불문하고, 장애로 인해 사회로부터 편견, 혐오, 배제 등 불평등이 없도록 최대한의 지원과 특수교육, 사회복지의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끊임없이 소망하고 천착했던 바는 모든 장애인들이 언어소통의 개선을 통해 당당하게 경쟁사회로 통합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었다.

최병문은 1975년 당시 한국의 특수교육 분야에서 관심 밖이었던 자폐성장애 아동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맹교육 20여 년, 농교육 33여 년, 지적장애 아동교육 20여 년의 경험을 살려 자폐아동 교육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였다. 1976년부터 지적장애 학생부 학급에 한 두 명의 자폐아동을 포함시켜 교육했으며, 1978년부터는 자폐아동 유치부 과정을 신설하여 본격적인 자폐아동 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최병문은 자폐아동의 감각통합요법 등과 같은 일본과 서구 선진국의 치료교육 방법들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번역·소개함으로써 한국의 자폐아동 교육분야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 장애인이 주체가 되는 마을 공동체, 우성원 설립하다

한국구화학교를 통해 청각장애 아동과 지적장애 아동 및 자폐아동들을 교육하던 최병문은 오갈 데 없는 16명의 지적장애인들과 함께 1967년 ‘무궁화촌’을 개원하였다. 바로 이 시설이 오늘날의 우성재단과 우성원의 모태였다.

당시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고 무엇 하나 풍족하지 않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최병문은 그저 장애가족들이 보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집을 만드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장애인들이 사는 집이 결코 지역사회와 격리된 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름도 ‘우성원’으로 지었다. ‘또 우(又)’, ‘거룩할 성(聖)’, ‘원’은 동산이라는 의미였다. ‘나라의 꽃으로 거룩하고 또 거룩하게 하는 삶터’로서 우성원이 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최병문은 장애인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인권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함께 모여 사는 행복한 동산과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아 ‘우성원’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렇게 ‘장애인들이 잘 사는 집’을 만들기 위해 우성원을 설립한 최병문이었기에 ‘나라사랑, 하나님사랑, 장애인사랑’의 정신을 기반으로 사회복지법인 우성재단 산하 시설인 우성원을 장애인의 인권 존중과 예방적인 복지를 지향하는 장애 당사자 권리와 욕구 중심의 생활 공동체로 키워나갔다.

최병문은 사회복지 전달체계는 ‘장애인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함께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장애인 서비스이용자들의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늘 깨어있는 자세로 임하도록 했으며, 스스로도 솔선수범하며 정성을 다했다.

그는 우성원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하였다. 개인의 자유와 독립적인 생활을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이용자가 원하면,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우성원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언제든지 외출하거나 나들이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시설이 아니라 그야말로 집 또는 가정이라는 의미가 실제로 장애인 이용자의 삶에 구현되게 했다. 또한 복잡한 서울시 안에 있으면서도 푸른 숲과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장애가족들의 보금자리인 우성원이 지역사회 주민에게도 개방적인 공동체로 인식될 수 있도록 늘 사람들로 북적이게 한 것도 인권 지향적인 시설 운영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사람들로 넘쳐나는 ‘사람 샘’과 같은 우성원이라고 자타가 공인하게 된 것도 설립자인 최병문의 시설 운영의 철학과 신념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성원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의 표정은 항상 밝다. 그들이 고백하는 말과 일상에는 웃음꽃이 만발한다. 우성원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오히려 쉼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따뜻한 집과 같은 우성원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가꾸어 나간다. 진정한 사람 사랑의 모범을 체험하며 산다.

한국구화학교와 우성재단은 한국 특수학교와 장애인복지실천의 뿌리와 발원지로서 자신들의 소명을 지금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장애인 사랑, 교육, 복지에 있어 대한민국 중심에 더욱 굳건하게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병문이 열정과 헌신으로 감당했던 장애인 교육의 근원, 장애인복지의 원천이자 발상으로서의 사명은 계속해서 이어지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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