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예수는 십자가의 참극을 면할 수도 있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온 유대 땅을 종횡하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외치던 예수를 불러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대체 네가 말하는 그 진리란 무엇이냐?"

어쩌면 예수는 십자가의 참극을 면할 수도 있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온 유대 땅을 종횡하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외치던 예수를 불러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대체 네가 말하는 그 진리란 무엇이냐?"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예수는 빌라도에게 진리를 말해주지 않았고 끝내 진리가 무엇인지 듣지 못한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도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노자를 굳이 원용하지 않더라도 진리에 관해 묵묵부답한 예수의 속뜻은 헤아려 볼 수 있다. 진리란 인간의 언어체계로 정의할 수 있는 범속의 세계가 아니라는 가르침이 예수 침묵의 참 의미일 것이다.

글은 말을 다 옮길 수 없고 말은 뜻을 다 담을 수 없을진대, 지금 우리는 진리는 없고 허황된 '언어의 성찬'만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허한 언어의 성찬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업동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밖에 나가 보았더니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인 채 대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는 류의 사연이었는데 가난했던 시절 우리들 힘든 살이의 일우(一隅)였다. 핏덩이의 배냇저고리 안에 영아의 태어난 날과 시, 이름이 적힌 편지 한 장을 접어 넣은 채 어미는 자손이 귀한 부잣집 대문 앞에 강보를 내려놓았다. 들은 바로는 업동이의 대부분은 그렇게 거두어졌다.

최근 들어서 업동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우리 사회의 복지시스템이 향상되어 업동이가 없어졌다면 천만다행이겠는데 유감스럽게도 유기되는 영아의 수는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이고 보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활고로 갓난아기를 포기하거나 심지어 어린 자녀와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등 저소득층의 양육문제는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보육의 공공성'을 목표로 내건 정부는 보육업무를 여성부로 이관한 데 이어 내년 1월부터는 영유아보육법을 시행할 예정으로 있다. 가난의 대물림을 막고, 균형경제를 통한 분배의 정의를 확립하여 모두 다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참여정부의 의지는 자못 가상하다.

그러나 지난 6월 보육업무를 이관 받은 여성부는 아직까지 정확한 저소득층 아동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액수의 보육예산을 써보지도 못한 채 불용예산으로 처리하여 반납해야 하는 실정에 있다. 배정 받은 예산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무능한 행정에 공공보육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사회복지시스템은 사상누각에 다름 아니다.

당장 한 끼의 식사가 급한 아이들에게 온갖 구호로 포장된 장밋빛 미래로 헛배를 불리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죄악이다. 언어의 성찬이 가난한 자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수 없듯이 공허한 구호로 이루어낼 수 있는 복지는 없다.

복지는 진리의 실천

장자 외물편에 '철부지급'이라는 고사성어의 출전 대목이 있다.

가난에 쪼들리던 장주가 어느 날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그러나 장주의 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감하후는, "좋네, 장차 내 봉읍(封邑)으로부터 사금을 거두어들이면 거기에서 삼백 금쯤 꾸어주도록 하겠네" 하였다.

이에 장주는 화를 내며 안색을 바로 하여 말했다. "제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누가 황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속에 붕어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제가 그 놈에게 묻기를, '붕어야, 너는 어찌 나를 불렀느냐' 하자, 붕어가 말하기를, '저는 동해의 파신(波臣)인데 어떻게 어른께서 몇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 저를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하기를, '좋다, 나는 바야흐로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 땅으로 가서 서강(西江)의 물을 이곳으로 끌어와 너를 살리려 하는데 그래도 되겠는가' 하였더니, 붕어란 놈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저는 지금 한 되쯤 되는 물만 있으면 살 수 있거늘 어른께서는 서강의 물을 말씀하시니 일찌감치 건어물가게로 가서 저를 찾으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무릇 먼 곳의 물은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하는 법이다. 복지는 언어의 성찬이 아니라 진리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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