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정신장애인 인권 친화적 치료환경 구축을 위한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밝힌 각국의 정신장애인 평균 입원 기간은 미국 6.4일, 영국 35.2일, 호주 89일 등이다. 한국은 평균 200.4일로, 압도적으로 길다. 강제입원 환자는 지금도 넘쳐나고 있는데 법무부는 법원에서 판사가 정신장애인 강제입원을 결정하는 ‘사법입원제’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정신질환자에게 ‘치료’보다는 ‘격리’를, ‘지역사회’보다는 ‘의료기관’을 우선하려는 이 같은 움직임, 과연 합리적인 방안일까? 정신질환자가 다른 신체적 질병을 가진 환자들처럼 지역사회에서 시민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우리나라의 정신건강복지정책은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할것인가?(편집자 주)

제철웅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제철웅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변방에서 주류 정책 영역으로 전환하고 있는 선진국의 정신건강

오랫동안 정신질환자는 사회참여 배제의 대상이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광인’이나 정신이상자는 후견인의 보호와 감독을 받아야 했다. 중세 영국에서는 국왕이 후견인으로 이들의 재산과 신상을 관리·감독하였다. 광기를 정신질환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19세기에도 이들은 수용소(asylum)나 정신병원 감금 대상이었다. 계몽주의 이래 ‘이성’이 인간의 속성이라고 보았던 주류 사회에서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윈은 이런 인식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정신질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다. 인간의 동물적 속성을 일깨운 그의 이론은 프로이드(S. Freud)로 이어졌다. 인간의 의식적 행동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에 이끌려 하는 것이고, 이성은 그것을 포장하는 작은 수단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인간행동만이 아니라 정신질환의 이해에 혁명적 변화의 길을 닦았다. 감금과 배제의 대상이었던 정신질환자 시민권 회복의 자연과학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참여했던 건강한 젊은이들이 정신질환자로 귀국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탈시설, 지역사회 기반 치료와 돌봄을 규정한 법안을 만든 배경의 하나이다.

이런 배경하에 1970년대 미국 법률가들은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된 정신질환자의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것이 정신건강을 주류 사회정책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강제와 배제의 법질서가 정신질환 치료에 오히려 부작용을 미친다는 역설을 체험하면서 이들은 인권을 중시하는 법과 절차, 그리고 제도를 운영하는 법률가가 정신과 약물이나 상담치료 못지않은 치료적 효과(therapeutic agency)를 낼 수 있는 존재임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미국에서 치료법학(therapeutic jurisprudence)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지역기반 치료 및 재활서비스 확충 없이 진행되었던 탈시설·탈병원의 부작용이었던 중독, 다양한 유형의 범죄 등으로 형사처벌 대상이되었던 정신질환자를 지역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행동문제’ 해결법원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유럽에서는 정신과의사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정신병원을 없애고 지역사회기반 치료, 활, 회복을 지향하는 이탈리아 바살리아(F. Basaglia) 개혁이 대표적이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 지역은 오늘날에도 정신건강혁신정책을 가장 잘 실천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24만 명의 도시에 24개의 병상만 있고, 입원도 하루 이틀 쉬어 가는 역할만 한다고 한다. 정신질환자가 지역사회에 포용되어 치료, 재활,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동기 학대와 방임, 상실, 폭력의 경험이 성인기 정신질환과 상관성이 있다는 1990년대 중반 미국 질병통계청의 아동기 부정적 경험(ACEs) 연구도 정신질환의 예방과 조기개입의 새로운 비전을 열어주었다. 정신의학에서의 발전도 한 몫을 하였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R. Dawkins) 가 신경과학의 마르코폴로라고 칭송한 라마찬드란(V. Ramachandran)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정신질환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뇌의 신경구조가 변화할 수 있다는 정신과의사 도이지(N. Doidge)의 연구도 정신건강정책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였다. 정신질환자 강제입원 금지, 동의 기반 치료, 지역사회 독립생활을 협약당사국의 의무로 규정한 UN장애인권리협약은 이런 변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WHO가 ‘QualityRights Tool Kit’을 통해 인권기반 정신건강치료정책을 적극 홍보·교육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진국의 정신건강정책이 주류 사회정책으로 전환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 여전히 변방에 머무르는 한국 정신건강정책

얼마 전 정부는 아동기부터 성인기까지 전 국민의 정신건강을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신건강정책을 혁신할 좋은 기회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그즈음 터진 신림동과 서현동 칼부림 사건, 신림동 성폭행 살해 사건은 진주 방화 살인사건 직후 떠들썩하게 논의되었다가 사라진 사법입원제도 이슈를 재점화시켰다. 그 후의 전개는 우리나라에서 정신건강정책을 혁신할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정신건강정책을 주류 사회정책으로 삼기 위해서는 정신질환자 ‘관리’ 목적의 치료 및 입원이 중심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서현역 사건 이후의 논의는 여전히 치료, 강제입원의 효율화에 중점이 있는 듯하다. 그 주된 배경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수반되는 중증질환으로부터 회복된 경험을 하였거나 사람이 가진 치유력에 힘입어 중증정신질환으로부터 회복되는 경험을 지켜 본 정책입안자나 전문가가 정신건강정책을 입안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질환자의 회복을 믿지도 않고, 보지도 않았고, 경험하지도 않은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은 정신질환자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나오는 정책은 정신질환자의 치료,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이 있는 사람’에 초점을 맞출 위험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정신건강정책을 주류화하고 있는 선진국의 전문가들이 비판하고 있는 ‘의료모델’ 그 자체이다. 물론 의료는 ‘치료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질환의 예방, 조기개입’을 ‘정신질환자 또는 위험군’을 대상으로 한 예방, 조기치료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선제적 의료정책이지 사회정책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선진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의 경험을 보더라도 학대, 방임, 상실, 폭력 등 사회관계망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이다.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생물학적 변화가 발생한 정신질환 상태에서는 매우 사소한 일 또는 현상이라도 정신질환자가 경험한 과거의 스트레스와 연결되어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비정신질환자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 무시하는 듯한 시선조차 정신질환자의 과거의 감정적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영국의 비판정신의학자인 몬크리프(J. Moncrieff)도 정신과 약물은 현실과의 괴리가 커지는 급성기때 현실감각을 되찾아 주는데 매우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정신질환자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약물복용이 사회관계망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요인’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훈련을 거쳐 스트레스 요인을 긍정적 삶의 활력으로 전환시킬 수는 있지만 약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십 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약물복용을 지속하더라도 환청과 망상에 시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담을 받든, 약물치료를 받든 사회관계망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 없이는 문제의 원인을 ‘질환자’에게서 찾게 된다. 이것을 바꾸어야 한다. 가장냉정한 전문가집단인 법률가들조차 제도와 사람이 가진 치유력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정신질환자를 둘러싼 사회관계망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정신질환에서 회복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자는 과거의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상쇄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 즉 사회관계망에서 상호인정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경험이 계속 축적된다면 중증정신질환자도 정신건강서비스를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회복패러다임이다. 

정신건강정책의 혁신은 정신질환자가 새로운 사회관계망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상호인정, 상호존중의 새로운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게끔 제도를 바꾸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 이것을 지향하지 않는 정신건강정책은 낡은 정책의 포장지만 바꾼 것에 불과하다.


○ 치유력 있는 혁신적 정신건강정책을 향해 

정신건강정책을 주류 사회정책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사람을 존중하는 공동체, 개성을 존중하는 공동체, 상호 존중과 인정이 상식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정책을 전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질환자, 정신질환 위험이 높은 개인에게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정책은 정신질환자를 더 차별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정신질환은 현대사회에서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감기와 같은 것’이라는 홍보가 인식개선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환경이 주는 다양한 메시지를 주관적 경험에 기반한 무의식, 그리고 감정을 의식의 힘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질환자인 ‘나’의 관점에서 지금의 제도를 이해하기 마련이다. 정신질환자를 결격시키는 법률만 25개가 넘고, 수백 개의 조례가 정신질환자를 차별하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평균입원기간이 200일이 넘는다. 병원이 아니라 생활공간이다. 그런데 좁은 방에 낯선 사람 6~8명이 생활한다. 강력사건이 나면 정신질환 전력이 있는지부터 보도된다. 너무 위험한,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살아남는 방법은 정신건강서비스제공자의 말에 따르는 것밖에 없다. 이런 제도는 치유력은커녕 정신질환을 악화시킬 뿐이다.

치유력 있는 제도가 되기 위해서는 정신질환을 다른 질환과 차별 없이 처우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제도개선이란 정신질환자를 관리대상으로 취급하는 제도를 폐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활서비스를 개인의 필요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등록회원제로 하는 것, 개인맞춤형의 서비스가 아니라 획일적 프로그램에 참가할지 여부만 선택하게 하는 것 등도 폐기해야 할 대상이다.

제도가 개선되더라도 치유력 있는 새로운 ‘인력’이 보강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일 뿐이다. 기존 정신건강서비스제공자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수적이다. 수가나 의사의 급여를 올리고, 정신건강전문요원의 급여를 올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서비스제공자가 일하는 일터가 바뀌어야만 기존 인력들도 변화하게 된다. 기존의 정신건강서비스 제공자와 전혀 다른 새로운 인력이 투입됨으로써 정신건강영역의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정신질환에서 회복되었거나 회복 과정에 있는 선경험자가 가장 적절한 후보군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누가 이끌어 낼 수 있는가이다. 회복을 경험하였거나 이를 직접 지켜본 정책입안자나 전문가 집단의 열정이 필수적이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이들의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런 ‘경험’과 ‘열정’을 갖춘 정책입안자나 전문가를 찾을 수 없다. 선진국과 달리 법과 사람의 치유력을 경험해 본 법률가도 없고, 바살리아(F. Basaglia) 같은 개혁적 정신과의사도 없기 때문이다.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매일매일 파괴되고 있는 정신질환자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복지현장에서 ‘경험’과 ‘열정’을 갖춘 전문가 집단이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길 밖에 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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