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서영대학교 사회복지행정과 교수
김민철 서영대학교 사회복지행정과 교수

지난 6월 15일은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하는 노인 학대 예방의 날이었다. 복지 관련 종사자들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날일 수 있으나 그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30여 년 전인 1991년 고령화에 따른 사회문화의 변화 속에서 노인인권 보호를 위해 UN이 채택한 ‘노인을 위한 원칙(United Nations Principles for Older Persons)’에서 노인 학대 방지와 관련하여 존엄(Dignity)의 원칙이 처음 제시되었다. 노인은 학대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국가가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후 2006년 UN과 세계노인학대 방지네트워크(International Network for the Prevent of Elder Abuse, INPEA)가 6월 15일을 ‘세계 노인 학대 인식의 날’로 정하여 노인 학대 예방을 위한 사회적 노력을 촉구하여 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노인 학대 예방을 위한 범세계적 노력이 진행되어 왔으며, 그 중심에는 UN 원칙에서 명시된 노인 존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존엄의 사전적 의미는 인물이나 지위가 높고 엄숙하다는 것으로 중세 봉건사회와 같은 과거에는 왕족이나 성직자 귀족과 같은 기득권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1776년 미국독립선언(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l'Homme et du citoyen)을 거쳐 인간의 자유, 행복 추구, 평등의 권리를 보장하는 약속에 이르렀고, 지금은 모든 사람이 존엄한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존엄의 의미는 무엇일까? 추상적인 개념을 조작적으로 정의하고자 할 때는 뜻을 깊이 성찰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dignity의 어원은 라틴어 dek에서 파생된 형태의 접미사로 여기서 dek은 기꺼이 받아들이다(Accept)라는 의미이다. 즉, 존엄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고 귀하게 받아들이는 관점이자 자세이다. 노인존엄은 노인의 신체·정서·정신적·영적 안녕을 실현함에 있어 노인 개인에게만 책임을 국한하는 것이 아닌 국가와 사회의 총체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노인존엄을 훼손하는 문제들로 차별, 배제,빈곤 등이 있으나 그중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노인학대이다. 이 글에서는 노인 학대 예방을 넘어 노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의 필요성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 가파르게 증가하는 노인 학대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2018년을 기점으로 노인인구가 14%를 차지하는 고령사회로 진입하였고, 2023년 기준 노인인구는 950만 명에 이르렀으며, 2025년에는 노인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 급격하고 압축적인 고령화 현상과 준비되지 않은 노인 관련 사회제도는 존경과 존중의 대상이었던 노인 세대를 혐오와 부담의 대상으로 변질시켰으며, 이로 인해 노인차별, 사회적 배제, 노인 빈곤과 같이 노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노인 학대 문제는 이러한 노인 관련 사회문제 중 하나에 해당한다. 2004년 ‘노인복지법’ 개정을 통해 노인 학대에 대한 국가적 개입의 근거가 마련된 이후 매년 노인학대 통계가 제시되고 있으며,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5년 2308건이었던 노인 학대는 2022년 6807건으로 약 3배 이상 증가했다. 

 

○ 우리나라 노인 학대의 특성 - 가장 안전한 공간의 역설

문제는 외부에 공표된 노인 학대 수치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20년 노인실태조사(보건복지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최근 1년간 학대 받은 경험이 있는 노인 비율은 9.9%로 조사되었으나 실제 신고율은 매우 저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노인 학대가 대부분 가정에서 발생하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노인 학대는 발생공간에 따라 크게 가정과 시설학대로 분류가 가능한데 5개년 평균값을 살펴본 바 가정 학대가 87.2%로 압도적인 비율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행위자 유형을 보면, 배우자와 아들을 합쳤을 때 전체 행위자 비율에서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노인 학대가 가장 친밀하고 밀접한 대상이자 부양과 돌봄의 관계에 놓여있는 가정 내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행위자에 대한 처벌 우려, 치매 및 돌봄이 필요한 피해노인, 행위자 특성, 오랜 시간 반복되어온 가정 내 갈등으로 인한 구성원들의 소진과 같은 역학 관계로 인하여 은폐되거나 제한적으로 개방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학대 피해노인은 직접적인 폭력으로 인한 신체적 손상과 학대로 인한 우울, 불안, 자살생각과 같은 심리적 손상을 경험할 수 있으며, 특히 신뢰관계에 있는 가족 사이에서 발생하는 학대문제는 타인으로부터의 학대보다 피해와 충격이 더욱 클 수 있다. 가정학대 피해노인의 경우, 문제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참으면 해결될 것이라는 비이성적 대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더욱 심각한 외상(Trauma) 충격을 초래할 수 있다.

국내 노인 학대가 대부분 가정에서 발생하는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가정학대 발생 비율이 약 40% 수준으로 기관, 타인 학대의 발생 비율이 더 높다. 학대 유형에서도 우리나라 학대 발생 유형이 정서·신체적 학대가 주를 이루는 것에 비해 경제적 학대의 비율이 높은 특성을 보인다. 미국 또한 과거에는 가정 내 학대가 주를 이루어왔으나 노인 학대의 양태와 행위자 범위의 확장, 노인 학대 조기발견을 위한 사회적 네트워크 구축 등으로 인해 사례 발굴이 다양하게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특성이다. 

 

○ 노인 학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처럼 국내에서 발생하는 노인 학대 문제는 분명한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에 따른 전략적 개입과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국내 노인 학대 발생 유형 및 특성에 맞춘 대응전략이 필요하다. 외국과 달리 가정 내 학대가 주를 이루고 있는 한국형 노인 학대 현장에 있어 처벌 위주의 사법적 개입만을 강조하기보다는 학대 피해노인의 회복, 행위자와의 관계 개선 및 가족자원의 강화와 같은 복지, 상담적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학대사례 개입에 있어 학대 유형, 원인의 다양성을 고려한 맞춤형 서비스 제공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피해노인의 신체·인지적 건강상태, 행위자 특성(알코올 및 정신질환 등), 가족 및 사회자원 등의 환경체계를 포함한 다각적인 접근이 제공되어야 한다. 또한 상담 및 개입 서비스의 질적 관리 및 향상을 위한 지속적인 개발 및 연구가 필요하며, 사전 예방을 위해 취약노인 및 위기가정을 발굴하여 서비스 지원 및 연계를 통한 강화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둘째, 노인보호사업의 현실적 수행을 위한 기반 구축 및 확장이 필요하다. 현재 노인보호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은 전국에 38개소가 설치되어 운영 중으로 노인 학대 발생에 있어 사전적 예방과 사후적 개입을 제공하고 있다. 2004년 이후 지속적으로 그 수가 늘어 왔으나 연평균 증가폭은 1.1개에 머무르고 있다. 2023년 노인인구 수가 950만 명에 육박하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부족한 인프라는 종사자의 업무과다 및 소진으로 이어지며, 사회복지현장에서도 노인보호전문기관 종사자들의 소진 및 이직률은 매우 높은 편이다.

2020년 ‘노인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의 소진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에서 전국 노인보호전문기관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10년 이상 노인 학대 대응사업에 근무한 종사자 비율이 전체의 10%이하였으며, 대부분 1년에서 3년 미만의 근무 경력을 보였다. 사례관리 업무의 특성상 종사자의 개입 수준은 서비스 수준과 직결된다. 종사자 소진 예방 및 업무공백 방지를 위해 노인보호전문기관의 현실적 수준의 확충 및 종사자 충원이 필요하다.

셋째, 노인 학대 예방을 위한 지역사회 중심의 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하다. 은폐되어 있는 노인 학대사례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노인이 머물고 있는 지역사회를 거점으로 공공기관, 의료기관, 복지기관, 금융기관 등 다양한 단체들의 공조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다양한 민관 기관이 연계되어 노인학대 대응프로그램(Elder Abuse Response Programs, EARP)이 실시되고 있으며, 노인차별 감소, 노인인권 옹호, 노인 학대 사례 발굴, 개입 등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 또한 매년 신고의무자 직군을 확대하고 협업기관간 연계망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보다 진일보하여 지역사회 내 노인인권 보장을 위한 협업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노인 학대 예방과 관련된 다양한 사전적·사후적 활동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 맺으며

2022년 우리나라 노인 학대 피해자 수는 6807명이었다. 이를 단순히 통계적 숫자로만 본다면, 아동학대, 가정폭력과 같은 다른 가정범죄에 비하여 높지 않아 보일 수 있으나 존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숫자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여기에 한 명의 노인이 서있다. 가장 안전하고 쉼의 공간이 되어야할 집과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 학대를 받고 있다. 무시와 배제, 투명인간으로 취급하거나 욕설과 폭언, 직접적으로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생명줄과 같은 돈을 빼앗기고 기초적인 의식주조차 제공받지 못한 상태로 숨죽여서 울고 있는 노인이 있다. 이러한 피해노인이 우리 앞에 6807명이 서있다. 이 숫자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면, 임마누엘 칸트의 말처럼 우리는 이 순간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인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다. 서두에 나누었던 존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는 노인을 어떠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귀함, 온전한 가치를 가진 대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단지 노인 학대를 예방하는 차원을 넘어 노인 존엄을 이루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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