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도 이사장은?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국문언어학 석사를 취득했다. 사회복지법인 송연재단의 전신인 사회복지법인 평화원의 설립자이자 원장, 학교법인 연풍학원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경기도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전국기독교아동복리회(CCF) 회장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목련장(1999년)과 무궁화장(2021년)을 수훈하는 등 우리나라 아동복지와 교육 발전에 평생을 헌신한 산 증인 중 한 분이다.

올해 96세로 70년 이상 사회복지 현장을 지켜온 최애도 사회복지법인 송연재단 이사장(평화원 원장)과의 인터뷰는 복지저널 창간 이래로 역대 최고령자와의 인터뷰다. 한 세기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여전히 아이들과 나라를 향한 사랑이 묻어났다. 최애도 이사장이 이 시대 사회복지 현장에 던지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최애도 사회복지법인 송연재단 이사장
최애도 사회복지법인 송연재단 이사장

 

사회복지 현장에서 70년이 넘게 헌신하셨다. 어떤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경남 진주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식량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어 더 이상 아이들을 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이들에게 “다른 시설로 가서 나는 선생으로 일하고, 너희들은 거기에서 살자”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죽으면 죽었지 다른 곳에는 안 간다”고 하니 “그럼 우리 다 같이 죽자”하고, 새끼줄로 서로를 묶고서 강에 몸을 던지기로 했다.

다리 난간에 올라서서 마지막으로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으니 이 강에 빠져 죽으려고 합니다”하며 기도하는데 “자살은 죄요, 아이들을 죽게 하는 것은 살인이다”라는 음성이 들려 난간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끌어안고는 울면서 “강에 뛰어들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건 죄라고 하셔서 할 수가 없었어. 다른 시설에 한 달만 가 있으면, 다 같이 살 집을 구해서 데리러 올게”라고 약속했고, 이후 창원에 거처를 얻어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려웠던 시절, 그때 아이들과 했던 약속을 잘지키며 살고 있는지 항상 생각하면서 아동복지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는 데서 시작한다는 소신으로 살아왔다. 사회복지, 후원자, 자원봉사자란 단어도 없던 시절에 평화원을 시작했는데 평화원 아이들이 어엿한 목사, 교사, 의사, 기업인으로 성장해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니 흐뭇하고 대견하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아동복지의 뿌리이며, 사회복지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신학을 전공했음에도 교역자를 마다하고 평화원을 설립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감리교신학대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황해도 연백의 고향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상을 입은 군경을 숨겨준 죄로 공산당에 체포됐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살아나서 1.4 후퇴 때 대구로 왔다. 당시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대구역 광장에는 오 갈 데 없는 피난민들이 맨바닥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감신대 동창 7명이 뜻을 모아 대구역 앞 2층 방을 하나 얻어 ‘주택알선사무실’을 차렸고, 대구 시내에서 빈방을 찾아서 피난민들을 입주시키는 일을 했다. 당시 이웃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선뜻 방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적었지만 사람들을 설득해 노인과 아이들이 우선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하고, 고아들은 따로 데려다 돌봤다. 

감신대가 부산에서 다시 개교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고, 1951년 7월 31일에 졸업하자 마산중앙교회에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지만 대구에서부터 데려온 아이들을 버려두고 나만 다른 길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날 기도와 고민 끝에 거절했다. 그러나 감신대 교수회의에서 다시 마산중앙교회 파송이 결정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전도사로 사역해야만 했다.

사역 중에도 깡통을 든 아이들만 자꾸 눈에 아른거려 이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교회 일과를 마치면 곧장 달려가 14명의 아이들을 돌봤다. 이 때문에 교인들 사이에서 거지들을 데려다 키운다는 구설에 올라 결국 전도사를 그만 두고, 아이들과 진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1952년 창원의 한 빈 집에서 평화원을 설립했다.

 

학교법인 연풍학원을 설립해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는데 배경이 궁금하다.

함께 생활하던 아이들 수가 3~4년 만에 104명으로 늘었다. 역전에서 지겟짐을 나르고, 보일러 기술자로 일하면서 받은 품삯으로 아이들에게 보리밥과 시래기죽을 먹였다. 그러다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평화원을 이전하기로 작정했다. 평화원부지(407평)와 건물(272평)을 창원감리교회 설립을 위해 기증하고, 1958년에 아이들 104명을 데리고 기차에도 탔다가 걷다가 하면서 40일 만에 경기 남양주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땅 2만 평을 사서 향나무 묘목을 심었고, 이를 팔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렀다.

87명이 중학생이다 보니 그 당시 한 학기 학비만 300만 원이 넘었다. 그래서 하루는 학교 교장을 찾아가 육성회비만이라도 감면해달라고 사정했는데 그 교장은 “거지새끼들 초등학교만 보내면 됐지 웬 중학교냐”는 반응이었다. 그 말에 화가 나서 “태어날 때부터 고아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신이 죽는다면 당신 자식들도 고아입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교육자입니까?”라고 소리치고 나왔다. 이 일 때문에 부모가 없거나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1963년에 파주시 연풍리에 소재한 삼광보린원(보육원) 강당 준공식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바로 용주골이라고 불렸던 집창촌 부근이었고, 이런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독교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준비 끝에 1966년 파주 연풍리에 땅 1만6000여 평을 구입했고, 이듬해 파주중학교, 3년 뒤에 파주공업고등학교를 개교했다. 토목과, 건축과, 전자과, 반도체과, 화공과 등 10개 학과 운영에 돈이 워낙 많이 들어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환하자는 정책을 세운 것에 발맞춰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간 다양한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지?

1963년 경기도농업기술자협의회가 일본에서 2개월 동안 비닐하우스 작물 재배를 연수한 성과를 우리나라에 안착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이 실험현장을 평화원에 유치했다. 그 덕분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오이, 호박, 상추, 시금치, 아욱, 근대, 고추 등 채소를 재배할 수 있어서 추운 겨울에도 아이들에게 싱싱한 야채를 먹일 수 있어서 모두 기뻐했다. 또 ‘소사(小舍) 제도(Cottage System)’를 운영한 것도 보람 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이는 현재의 ‘그룹홈’ 형태와 비슷한데 아이들 성(姓)별로 한 집에 살게 하고, 가장 큰 아이의 이름으로 문패를 붙여 줬다. 비록 생활비는 합숙보다 갑절 이상 들었지만 제대로 된 가정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었다.

아이들의 원가족 복귀 사업을 진행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일흔 살이 될 무렵, 새해를 맞으면서 아이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가까워 졌다는 것을 느끼고,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큰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와 사는 것이 소원이니 그것을 선물해주자는 생각으로 부모와 아동이 모두 원하고, 재결합하는 것이 아동에게 최선이라고 판단될 경우, 원가정으로 복귀시키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렇게 1996년 1명, 2004년 3명의 아 이가 부모 품으로 돌아갔고, 2011년 3명, 2012년 3명, 2013년에는 4남매를 포함해 6명의 아이들이 원가정으로 돌아갔다. 그중 4남매의 복귀는 3년간 부모와 상담하고, DNA검사를 받는 등 부단한 노력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이후 2014년 4명, 2016년 3명, 2017년 2명, 2019년 2명, 2022년 3명이 원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 복지정책 및 제도 등에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한국전쟁 시기 고아원은 장애인, 미혼모, 노인들과 같이 생활하는 종합사회복지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후에 장애인, 노인 등 복지 분야가 세분화되면서 아동복지의 역할이 축소됐다. 이처럼 사회복지의 출발이자 토대였던 아동복지를 최근 들어 정부와 지자체가 등한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동들이 받아야 할 혜택과 지원은 여전히 최저 수준에 불과하다. 재원 아동 수를 줄이고, 양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현장의 어려움은 외면 받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복지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 관점에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선진국의 과거 정책을 모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현재 부모가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한국형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며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가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은 이 나라의 꽃봉오리다. 꽃이 활짝 필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어떤 사회의 도덕성은 그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의 말씀을 한국 사회가 귀담아들어야 한다. 

 

복지저널 구독자 및 사회복지 현장의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세상에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음에도 복지저널을 구독하는 독자들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들께 감사하다. 감히 말씀드린다. 사회복지 예산, 국가 정책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수고하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아동과 국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따라 우리나라 복지의 수준이 결정된다. 우리나라 복지가 세계 최고 수준에 닿을 때까지 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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