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범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유범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시민들의 좋은 삶과 행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기원전 도시국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이다. 그는 ‘정치학’과 ‘윤리학’을 통해 행복하고 좋은 삶을 위해서는 시민들 간의 우정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우정이 가능하려면 좋은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서 우정이 좋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활동이고, 우정을 형성하는 것이 정치라고 봤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존재(zoon politikon)’라고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정치는 제도나 선거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복지, 좋은 삶을 위한 정치다

사회복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공동체를 통한 행복한 삶을 꿈꾼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사회복지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공적인 대응을 하는 공동체를 지향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복지는 사회적 위험에 맞서는 공적인 대응 활동이고, 이를 통해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시민들의 안녕을 도모하는 철학과 실천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복지의 본성은 정치적이다.

좋은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는 우정에 기반한다. 이 맥락에서 사회복지는 시민들의 우정을 이론화하고 실천해왔다. 사회복지가 추구하는 우정이란 무엇일까? 시민들이 권리를 알고, 이 권리가 실현될 수 있는 권력, 즉 연대에 기반한 ‘시민력’을 가지는 것
을 지향하는 가치이자 활동이다.

복지국가 영국은 시민권을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로 보고,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해 이 권리를 목록화했다. 국가는 결핍, 무지, 질병, 불결, 나태 등에 대해 공적으로 대응할 책무가 있고, 시민들은 이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시민권의 우정은 혈연과 가족을 넘어 국민국가 속의 이웃을 서로 책임지고자 했다. 이 우정은 가족을 넘어선 국가 속 이웃의 연대이다. 그런데 이 우정의 연대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한 ‘선언’만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우정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민들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왔을 때 시민들은 전쟁기간 중인데도 질서를 지키면서 1.6km나 줄을 서 생필품을 구매하고, 토론을 통해 이 보고서를 실현해 낼 정치인을 선택했다. 베버리지 보고서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보수당의 처칠은 전쟁승리의 영웅임에도 결국 낙선했다.

이처럼 사회복지는 자신의 권리를 알고 이것을 관철하기 위해 권력을 갖는 정치적 존재, 즉 시민의 형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이 권리와 권력의 연대는 유효할까? 사회복지가 권리와 권력의 실천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권리의 내용과 시민력의 주체는 시대와 관계에 따라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시민권은 국민국가 속 시민들의 우정을 기초로 삼고 있다. 그런데 난민은 어떤 논리로 연대할 것인가? 지구촌이라는 공동의 공간에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이므로 나와 동일하게 인권을 갖는 존재이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 동물이나 자연과는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그동안 인간은 자기중심주의로 다른 종과 자연을 차별해 왔고, 그 결과 지구촌은 위험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상상, 즉 생명을 가진 존재와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동체의 안전, 즉 가족과 국가를 넘어선 지구촌과 그 속의 사람들과 연대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새롭게 정의된 권리 목록과 우정의 확장은 권력의 연대도 변화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회복지는 권리와 권력에 대한 이론이자 실천이고, 항상 시대적 문제에 맞서 싸우면서 상상하고 변화하는 정치인 것이다.

 

철학의 빈곤과 정치적 중립주의라는 신화

앞에서 사회복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기대어 사회적 위험에 맞서 싸우는 이론이자 실천이고, 시민들의 권리와 권력에 대한 정치적 활동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한국의 사회복지는 어디에 있을까? 본 글은 한국의 사회복지가 철학의 빈곤상태와 정치적 중립주의라는 신화 속에서 ‘정치의 결핍’ 상태에 있다고 본다.

한국의 사회복지는 철학적 성찰보다는 실천에 주력해 왔다. 권리보다는 자선과 시혜의 관점에서 어려운 이웃을 선별하고, 이들에게 사회서비스를 전달하는 것에 주력해 왔다. 사회복지의 실천이론과 실천기술은 이용자의 강점을 발견하고, 주변 환경에 잘 적응시키는 사례관리를 목표로 한다. 사회복지사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량한 사람의 이미지로써 ‘자선가’와 ‘보듬이’가 된다. 이 관점에서는 사회복지를 시민권이라는 권리를 시민력이라는 권력으로 실현하는 정치로 이해할 여지가 거의 없다. 사회복지 현장은 주로 권리와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회복지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사례관리 프로그램에 집중한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탈정치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사회복지는 과연 정치에 중립적인 것일까? 이는 역설적이게도 중립이 아니라 현존 질서를 인정하고 순응하는 매우 정치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정치적 중립주의라는 태도만큼 정치적인 것은 없다고 비판한다. 특정 철학으로 무장하고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기차에 묵묵히 연료를 제공하는 충실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정치적 중립주의라고 생각하면서!

이처럼 한국의 사회복지는 천사주의와 정치적 중립주의에 갇혀 정치를 멀리하고 싶어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현존 질서에 순응하는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즉 사회복지는 사회의 불평등과 시민의 정치세력화 문제에 개입할 철학과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복지는 정치참여와 영향력의 확대를 권리를 알고 권력을 갖는 시민세력화로 이해하기 보다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특정 인사의 정당 참여나 사회복지기관의 정당지지 여부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왜 한국의 사회복지는 정치참여를 사회복지 현장에서 만나는 시민들의 권리와 권력의 조직화에서 찾기보다 소수 사회복지 인사의 정당과 선거 참여로 이해할까? 이는 사회복지의 역할을 사회관리보다는 사례관리와 자선·봉사로 이해하는 경향과 철학에 원인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복지 현장의 권력 종속성에 원인이 있다.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사회복지기관은 지방권력이 바뀔 때마다 생존의 기로에 선다. 지방권력이 사회복지기관을 전리품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지자체장과 지방의원이 될 것인가가 기관장들의 초미의 관심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선거정치와 정당정치에 정치적 끈을 댄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사회복지 현장 사회복지사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혐오하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사회복지의 정치참여 방법으로 현장 사회복지사가 직접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는 방법이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이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제도권 정치로 진입하는 순간 사회복지사 출신 정치인은 기성 정치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다음 선거에 공천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회복지보다는 정치공학에 더 민감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사회복지사 자격증이나 경력을 가진 정치인이 많이 배출되었다고해서 사회복지의 정치세력화가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사회복지 경력을 가진 정치인의 개인적인 결단으로 시작된 정당정치 참여는 사회복지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들은 사회복지 철학과 좋은 삶을 위한 정치보다는 공천정치와 선거정치를 위해 사회복지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빈곤과 맞물려 사회복지의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정치 무관심이 득세하는 지금 상태에서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민주주의 실험실과 인권활동가

사회복지의 정치참여는 철학을 분명히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존재의 본성이자 좋은 삶을 향한 시민들의 우정을 만들고, 이 우정으로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사회복지야말로 좋은 공동체를 위해 시민들의 연대와 우정에 기반해서 좋은 삶을 만드는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위해 실천하는 정치적 존재이다. 사회복지 현장은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모이는 곳이다. 이곳이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와 권력에 대해 학습하고, 좋은 삶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지방자치의 광장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사회복지협의회와 사회복지사협회 등 사회복지 관련 단체와 민관이 함께하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사회복지계 인물의 제도권 정치참여처럼 사회복지의 제도권 정치참여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의 구조적 한계, 즉 정부보조금으로 운영되거나 제도권 정치에 종속된 상태에서 이는 하나의 통로일 뿐 본질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정치참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를 정당과 선거에 가두는 기존 관점을 넘어서서 풀뿌리 시민력의 강화와 사회세력화에서 찾아야 한다. 즉 시민들이 권리를 알고 권력을 갖게 하는 것인데 사회복지 현장이야말로 이것을 위한 최적의 장소이다. 사회복지 현장이 개인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복지기관에 찾아온 이용자를 권리와 권력을 가진 시민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복지 역사에서 나타난 인보관 운동처럼 사회복지 현장이 시민들의 학습, 소통, 실천의 민주주의 실험실이 되는 것이다.

사회복지 현장이 민주주의 실험실이 된다면, 사회복지기관과 사회복지사의 정체성은 변할 수 밖에 없다. 사회복지기관은 사례관리로 돌봄의 역할을 하는 ‘케어센터’에서 권리를 알고 시민력을 통해 사회관리를 하려는 ‘커뮤니티센터’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사회복지사는 서비스전달자를 넘어 시민권과 인권을 실현하는 활동가가 되어야 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프로그램을 모색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사회복지기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더 이상 돌봄이 아니라 공동체를 돌보는 연대의 우정을 나누는 주체가 될 것이다.

북유럽을 학습동아리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른다. 성인 인구의 70% 이상이 학습동아리에 참여하고, 이곳에서 민주주의를 학습한 시민들이 제도권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보관 운동에서는 사회복지 현장이 학습과 토론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의 요람이 됐다. 도처에 존재하는 사회복지 현장이 이처럼 민주주의 실험실이 된다면, 한국의 지방자치는 원래 의도대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사회복지 현실에서 이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라면, 철학과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 이상이 일상이 되는 상상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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