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원칙은 국익, 실용, 공정, 상식으로 ‘국익과 실용’에 대해서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자세’를 강조했으며, ‘공정과 상식’에 따라 ‘이념이 아니라 국민의 상식에 기반해 국정을 운영’할 것임을 명시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인수위원회 워크숍에 참석하여 “국정과제 선정 시 실용주의와 국민의 이익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즉, 현재까지 드러난 윤석열 정부의 국정기조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실용주의는 이미 이명박 정부 때 국정기조로 사용되어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명박 정부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모든 정부 정책 운영의 준거지침으로 실용주의를 강조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추구했던 ‘능동적 복지’는 편의적으로 실용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성과 측면에서는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더 나아가 실용성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복지국가의 정책기조로서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꼬리표가 붙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면밀히 고찰하고, 복지정책 기조로서 실용주의의 활용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실용주의 사상의 철학적 가치

실용주의는 187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사상으로 찰스 샌더스 퍼스(C. S. Peirce)와 윌리엄 제임스(W. James)가 실용주의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이후 존 듀이(J. Dewey)가 고전적 실용주의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용주의는 절대적인 진리로 보이는 이론도 향후 변경될 수 있다는 유연한 관점에서 이론을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실천적인 도구로 인식하고, 인간의 지식이 갖는 실천적 유용성에 집중한다. 실제 삶 속에서 더욱 유용하고 가치를 갖는 것이 ‘참’이며,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절대 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관점은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끝난 뒤, 지역 갈등과 인종 갈등을 중재하고 국가 통합 및 발전을 달성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실용주의 철학은 듀이 사후 쇠퇴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석철학이 철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됐다. 실증주의와 달리 분석철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데 특히 언어철학과 과학철학의 영역에서 크게 발전했다. 다만 분석철학은 점차 매우 전문적이며 세분화된 문제만을 다루는 경향이 있어 일반인은 이해가 어려운 전문가만의 철학으로 일컬어졌다. 1980년대 들어 분석철학을 비판하고 실용주의의 부활을 주창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분석철학을 전공한 리처드 매케이 로티(R. M. Rorty)였다.

로티의 실용주의는 신실용주의(Neo-Pragmatism)로 불리며 고전적 실용주의와 구분되는데 현대 자유주의 사회에서 연대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로티는 정치사상가 또는 철학자가 어떠한 체제가 우월한지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이며, 그보다는 근대 자유주의 체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연대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현실 사회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신실용주의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간혹 실용주의를 말할 때, 실용주의 철학에서 ‘현금가치(cash value)’를 중시하는 것을 두고 경제적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추구한다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에서 설명하는 현금 가치는 경제적 가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식이나 신념, 가치 등이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오히려 실용주의는 사람마다 ‘실용’의 기준이 다를 수 있음을 수용하는 개방적 태도를 중요시한다. 특히 타인에 대한 배려, 연대성, 공동체 의식 등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로티의 관점은 수많은 분열과 갈등에 직면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용주의와 ‘지속가능한 복지’

윤석열 정부는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강조하며 ‘지속가능한 복지’를 비전으로 발표했는데 과거 보수 정권의 ‘선(先)성장 후(後)분배’ 기조와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서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복지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국정철학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요구된다. 윤석열 정부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실용’이란 개념이 실제 삶의 변화를 가져오고 사회적 연대를 지향하는 실천적 철학인 실용주의에 근거함을 명확히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 때의 ‘창조적 실용주의’와 ‘능동적 복지’가 받았던 개념적 모호성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수사로 실용주의를 이용한다는 오해를 사전에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가 110대 국정과제로 제시한 복지국가 개혁의 주요과제들을 살펴보면, 첫째,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사회적 취약계층 및 저소득층 지원을 강화하고, 둘째, 사회서비스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여 민간이 참여하는 사회적 경제 비중을 높이며, 셋째, 복지체계 및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두 가지 성격의 개혁이 함께 추진해야 함이 드러난다. 이러한 내용은 이념을 초월하고 실천적 유용성을 강조하는 실용주의 사상의 관점과 부합하며, 특히 로티가 주장한 자유주의적 연대가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로의 개혁에 있어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선거철마다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한 선심성 공약이 늘어나며 ‘복지 포퓰리즘(populism)’에 대한 지적과 복지재정 부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속가능한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된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들은 이념을 초월한 사회적 연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달성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개혁의 핵심으로 언급되는 연금개혁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국가적 차원의 합의와 연대가 필수적이다.

또한 사회서비스 산업 발전을 통해 복지와 고용의 선순환 구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민간 기업과 단체의 사회공헌 및 사회적 경제 규모를 확대시킬 필요가 있는데 사회구성원으로서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여 이해관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념적 소모를 지양하고, 연대성을 통해 실천적이며 유용한 대안을 도출하고자 하는 실용주의 철학과 정확히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으로의 첫 걸음, 실용주의

일상어로서 ‘실용주의’는 종종 다른 가치를 무시하고 경제적 유용성만을 좇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실용주의자’는 간혹 ‘세속주의자’로 호도(糊塗)되어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실용주의 철학의 핵심개념과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사유보다는 실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며, 다원주의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의 연대성을 강조한다.

이미 여러 차례 윤석열 정부에서는 실용의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실용주의에 대해 “어떤 정책이 더 국민을 이롭게 하는가를 기준으로 정책을 실행하겠다는 태도”라고 설명한 바 있다. 또한 지속가능한 복지를 비전으로 제시하며 ‘상생의 연금개혁’을 추진하고 저소득층에 대한 ‘두터운 소득지원’, ‘사회서비스 혁신’과 ‘복지·고용·성장의 선순환’ 등을 핵심과제로 설정하였는데 보다 분명히 실용주의를 국정철학으로서 명시하고, 국민의 공감을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상의 국정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갈등과 분쟁을 조정하고, 실질적인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주장하는 실용주의 사상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심화된 경기침체 및 분배 양극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 장기화 속에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이념 간, 세대 간, 지역 간, 남녀 간으로 갈라져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소모적인 논쟁을 중단해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실제 삶에 유용한 대안을 고민하는 실용주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공동체 의식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달성하여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것은 곧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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