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영 전라북도 남원시청 주무관
이아영 전라북도 남원시청 주무관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장래희망에 대해 물어보신 적이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답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건 청각장애인인 첫째 동생과 지적장애인인 둘째 동생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직장이었던 복지관에 입사했을 때 관장님께서 우리 엄마를 보시고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어떻게 하나도 아니고 장애아 둘을 키우셨나요?”라고 하셨다. 정말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들보다 두 배 이상 더 고생을 하셨다. 나에게 사춘기가 왔을 때 나는 내 가정환경이 원망스러웠다. ‘나에게도 정상적인 형제들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차라리 나 혼자였으면 어땠을까?’ 라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난 어려서부터 속이 깊고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들으며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 오며 자랐다.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온순한 우리 아빠, 화끈하고 인정 많은 우리 엄마… 우리 부모님은 우리 세 자매를 차별 없이 키우셨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다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새끼다”라는 책임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속상하고 우울한 날도 있었지만 유쾌한 우리 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잘 이겨내고 살아왔다.

어느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 또 사무실이냐? 몸 생각해라. 너 많이 말랐더라. 아프지 않아야 한다. 돈 조금 보낼테니 한약도 한 재 지어 먹어라.” “큰딸아 얼마 전에 우리 가게 못하게 오기 부렸던 그 인간 뒤졌다. 죄도 지은대로 받고 복도 지은대로 받는다. 그러니 잘 살아야 한다.” “큰딸아 저번에 어떤 할머니가 찾아오셨는데 가게를 접은 지 20년이 지났는데 우리 집을 물어물어 찾아왔더라. 그 옛날 외상값하고 맥주 두 병을 받아오셨더라. 우리가 가게 접을 때 못 받은 외상값들이 많은데 뭔 일인가 싶었지. 그런데 그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집안에 자꾸 우환이 생겨서 오래된 외상값을 갚으러 왔다지 뭐니. 참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사람은 죄짓고는 편히 못산다. 그 할머니도 이제 마음이 훨씬 편해지셨겠지. 그러니 큰딸아 정말 잘 살아야 한다.”

평범하지 않은 나의 가정환경 탓일까 나는 지금껏 소명의식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일해 왔다. 내가 겪은 차별과 아픔들이 많았기에 민원인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민원인들을 보면 우리 엄마 같고 동생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어려운 일에도 길이 생기고,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분들이 많이 생겨났다.

돌아보면 잊혀지지 않는 일도 많이 있다. 기초수급자가 되어서 너무 고맙다고 한 달 치 생계비를 찾아 가져오신 할머니 때문에 너무 당황했던 일, 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자는 정신질환 여성을 정말 어렵게 병원으로 보내 입원시킨 일, 10년 전 한 폐암환자를 위해 바자회를 열었는데 그 덕인지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며 뿌듯했던 일 등등 정말 그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힘들었던 사람에게는 힘든 사람이 잘 보인다. 그리고 그 힘든 사람을 도와주고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고민한다.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어렵고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진심을 다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돕는다. 나는 여태껏 그런 작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작은 것에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했다.

한 드라마에서 평소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이정은 씨가 말한 대사로 마무리할까 한다.

“잘난 것과 잘 사는 거랑 다른 게 뭔지 아냐? 못난 사람이라도 잘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나 여기 살아 있다, 나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잘 사는 거다. 잘 난 건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 건 너 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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