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빈 서울시립상이군경복지관 사회복지사
김예빈 서울시립상이군경복지관 사회복지사

어렸을 적, 하루는 아빠가 퇴근하면서 어느 할머니가 길에서 파는 과일을 몽땅 사 오셨다. 우리 가족이 한 달 동안 먹기에도 많아 보였지만 부부는 닮는다고 엄마는 아빠를 타박하는 대신 웃으면서 잘했다고 한 기억이 난다. 머리가 조금 커서는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부모님이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마다 주변에서 제 일처럼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과 배려는 돌고 돌아 내게 다시 돌아옴을,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여러 사람이 ‘일은 힘든데 돈 많이 못 벌잖아’라며 걱정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게 중요한 가치는 ‘약자를 옹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는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가치를 찾아내고, 고통과 슬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의 기쁨과 보람을 함께한다. 이것은 내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며, 내 삶의 원동력이 된다. 관심받지 못하는 곳에 손을 내밀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진심어린 행동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이자 인생의 꿈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상이군경복지관은 전쟁이나 훈련 중 부상을 입어 장애를 가지게 된 군인·경찰을 위한 복지관이다. 홍보업무를 담당하면서 꼭 이루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상이군경들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사실 구인공고를 보기 전까지도 ‘상이군경’의 뜻을 몰랐다. 내 주위의 사람들, 사회복지를 전공한 친구들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나서야 상이군경을 위한 복지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외할아버지의 손녀로서 나름 보훈에 대해 꽤 안다고 생각했는데 참 부끄러웠다. 이곳에 취업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이군경을 알려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입사해서 첫 업무로 홍보업무를 맡게 된 것은 필연인 듯하다.

 

당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복지관 회원 중에는 손가락이 없거나 귀가 안 들리고,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고서도 자부심이 담겨있는 여러 배지들을 깔끔한 모자나 정장에 주렁주렁 달고 오시는 분이 많다. 복지관에 처음 온 회원들이 다른 회원들과 대화를 시작할 때는 달고 온 배지, 복무했던 부대, 참전했던 전투와 거기서 입은 상처를 소재로 대화의 물꼬를 트곤 한다. 이것이 그들에겐 삶의 증거이자 표현방식이기도 하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목숨 걸고 지켜낸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뇨합병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었던 회원이 있었다. 눈이 점점 안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주 부딪히고 넘어져 다치는 자신의 모습에 우울감이 깊어져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했다. 복지관에서 사례회의가 열렸고, 가족들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인 회원을 위해 자원봉사자와 연계하여 병원에 동행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또한 시각장애인복지관과 협력해 시각장애인 생활훈련을 연계하는 등 회원 욕구에 따른 서비스 지원 계획을 세우고 진행했다. 그 결과 지금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도 많은데 자신은 들을 수 있고, 냄새도 맡고,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냄으로서 적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자칫 삶의 전쟁에서 스러질 수 있었던 한 영웅의 삶이 달라진 것이다.

몇 년 후, 상이군경의 존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복지관 회원의 90% 이상이 70~80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과 공존하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며, 그래서 더욱이 이들을 알리고 예우하는데 최선을 다하려 한다. 평화가 자리한 현대의 우리들에게 보훈이란 남일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후손들의 인정과 감사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자긍심을 갖게 하는지 우리는 꼭 알아야만 한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사랑 속에 자라듯 어른도 사회의 인정 속에 살아간다. 국가유공자와 상이군경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의 인정과 감사 속에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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