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강원도 고지대는 벌써 겨울 기운이 느껴지는 이즈음이다. 해인사와 합천호, 그리고 황매산을 둔 경남 내륙의 합천땅은 늦가을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곳이다.

저 강원도 고지대는 벌써 겨울 기운이 느껴지는 이즈음이다. 해인사와 합천호, 그리고 황매산을 둔 경남 내륙의 합천땅은 늦가을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곳이다. 특히 해인사 홍류동 계곡은 곱디고운 오색 단풍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이름(홍류동)이 말해주듯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물이 붉게 보일 정도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까지 둘러볼 수 있어 꿩 먹고 알 먹는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가야산을 두른 해인사의 지붕선.
가야산을 두른 해인사의 지붕선.

가야산을 두른 해인사의 지붕선.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이자 의상대사가 세운 해인사로 간다. 익히 알려져 새삼 다시 들춰본다는 게 식상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네 마음속에 깊이 각인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해인사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수확을 거의 마친 들녘과 노랗고 붉게 물든 은행나무와 벚나무, 그리고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색색의 산은 가을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은행잎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슴을 찡하게 울리고 텅 빈 논에 서 있는 갖가지 모양의 허수아비는 제 임무를 다한 듯 가만히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건드리면 톡 터질 것 같은 파란 하늘과 어디론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뭉게구름도 정겹긴 마찬가지다.

가을빛 물씬한 합천호 산책길.
가을빛 물씬한 합천호 산책길.

가을빛 물씬한 합천호 산책길.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왼쪽에 있는 샘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깊은 맛이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해준다. 오른쪽 길로 들어가자 성철 스님 부도밭이 보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설파하며 세상을 조용히 그러나 엄격하게 바라봤던 고승의 철학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저 어지러운 세상에 맑은 빛 한 줄기를 내려주신 분!

절을 찬찬히 둘러본다. 해인사가 더욱 돋보이는 건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기 때문이다. 돈오돈수의 대선사 퇴옹 성철 스님을 비롯하여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큰스님들의 수행처도 이곳 해인사였다. 이 절이 간직한 문화유산은 수두룩하다.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 장경판전(국보 제52호), 해인사고려각판(국보 제206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등은 우리 옛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대장경판을 보관해 놓은 장경각은 보존과학의 우수성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서남향으로 건물을 올린 장경각은 햇빛을 고루 받을 수 있도록 자외선과 적외선을 최대한 고려해서 지었다. 이를테면 자외선은 이끼나 곰팡이를 막아주고 적외선은 찬 흙바닥을 데워 건물 내의 온도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켜준다. 여기에 소금과 숯으로 마감한 바닥은 습기를 방지해주고 창은 통풍이 잘 되게 얇게 짰다. 대장경판이 7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치밀한 과학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합천호를 바라보고 서 있는 정자, 광암정.
합천호를 바라보고 서 있는 정자, 광암정.

합천호를 바라보고 서 있는 정자, 광암정.
장경각 앞 담장에서 내려다보는 해인사의 지붕선이 주위의 숲과 참 잘 어울린다. 해인사는 가야산 깊숙한 곳에 여러 암자도 거느리고 있다. 초기 해인사 터로 알려진 원당암을 위시해 성철 스님이 머물렀던 백련암, 사명대사가 입적한 홍제암, 일타 스님이 머물다간 지족암, 그리고 비구니 스님들이 있는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등이 그것들이다. 또한 해인사 인근 가야면 황산리 홍류동 남쪽에는 최치원이 지었다는 청량사가 있다. 절 뒤의 남산 제일봉(1,010m)은 천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듯 하다 하여 불가에서는 '천불산'이라 부르고 있다. 천불산은 당일 산행지로 적당한데 가야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절 답사를 마치고 타는 듯 붉은 홍류동 계곡 탐방에 나서보자. 홍류동 계곡에는 최치원 선생이 갓과 짚신 두 짝만 남겨놓고 신선이 돼 버렸다는 농산정(濃山亭)이 있고 그 옆엔 '고운 최선생둔적지'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정자 아래 물가로 내려가면 최치원의 친필 시를 새긴 큰 바위가 있는데,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보물 여러점을 간직한 영암사지.
보물 여러점을 간직한 영암사지.

보물 여러점을 간직한 영암사지. 솔향기를 맡으며 계곡길을 걷노라면 신선이 된 기분이다. 돌돌돌 흘러내리는 청류는 산새 소리와 어우러져 흐려있던 정신을 맑게 틔워준다. 계곡 위로는 1분이 멀다 하고 자동차가 오간다. 그 모습이 왠지 부자연스러운 건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망가뜨렸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홍류동은 금강산 옥류천과 견줄만큼 아름답다 하여 옥류동이라고도 부른다. 홍류동 계곡에서 단풍에 취했다면 이번에는 가야산을 오른다. 등산로는 대체로 평탄하다. 해인사 용탑선원→극락골→마애불상→가야산 대피소→가야산 정상→극락골→해인사로 내려오는데, 약 4시간 30분(산행 거리 10km) 정도 걸린다.

88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으로 나와 합천 이정표를 보고 묘산면 소재지에서 합천댐 방면으로 간다. 가을 합천호는 한 폭의 그림이다. 단풍과 어우러진 비취빛 호수는 사무치도록 서정적이다. 저수용량 7억 9천만톤의 합천호는 1988년 합천댐을 완공하고 난 뒤 생긴 인공호수로 황매산, 악견산, 금성산, 소룡산 등 우뚝 솟은 산줄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깊은 맛이 한결 더하다. 특히 합천에서 댐을 지나 거창까지 이어지는 호반도로는 전국 최고의 낭만 드라이브 코스다. 또한 수초가 많아 낚시를 하기에도 제격이고, 곳곳에 단풍나무를 심어놓아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권할만하다.

합천 8경의 하나인 황계폭포.
합천 8경의 하나인 황계폭포.

합천 8경의 하나인 황계폭포. 합천호에 안겨 있는 황매산(1108m)에도 올라보자. 하봉, 중봉, 상봉 등 세 봉우리가 불쑥 솟은 산 정상이 마치 호수에 떠 있는 매화 같다고 하여 '수중매'라고도 불린다. 정상 아래 펼쳐진 황매평전의 목장지대는 산행 중에 만나는 명소. 철따라 온갖 꽃들이 피어난다. 정상에 서면 푸른 합천호와 산청땅 차황면 쪽의 산과 들, 그리고 멀리로는 지리산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황매산의 진면목은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모산재.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이 모산재 아래에는 영암사터가 있다. 절의 역사는 묘연하지만 절터에서 만나는 쌍사자석등(보물 353호), 귀부(보물 489호), 삼층석탑(보물 480호), 금당터 등은 예사롭지 않다. 영암사지는 여느 절터와 다른 특징이 몇 가지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 복판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 모양과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등이 그렇다. 이 절터에서 발견된 8세기께의 금동여래입상은 절의 연대를 살피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산행 코스: 둔내리-황매정사-무지개터-모산재(정상)-철쭉 자생지-황매산성터-순결바위-황매산 정상-국사당-영암사지. 왕복 3~4시간쯤 걸린다.

황매산의 매력은 산청과 합천 양 방향에서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해발 800m에 들어선 다목적 광장(영화주제공원, 산청 쪽)과 목장(황매평전, 합천 쪽)에 주차가 가능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황매산 자락 반대편 산청땅 차황면 법평리와 상법리는 민가와 계단식 논이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보여준다. 법평리에서 황매산으로 오르는 중턱에는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단적비연수' 촬영장이 있다. 영화주제공원으로도 불리는 이곳까지는 꽤 가파른 길이지만 자동차가 다니는데 무리가 없다. 이곳에서는 황매산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쉬엄쉬엄 걸어 올라도 40분이면 정상에 닿는다. 특히 정상 부근 황매평전을 가득 수놓은 억새 무리는 가을날의 서정을 진하게 풍긴다.

마지막으로 갈 곳은 용주면 황계리에 있는 황계폭포다. 합천8경중 제 7경에 드는 이 폭포는 합천읍에서 30분 거리로 1026번 지방도로변에 있다. 구장산(龜藏山) 자락을 타고 내려온 물줄기는 20여 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서 힘차게 떨어지는데 어떤 이는 그 소리가 천둥이 치는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옛 선비들은 그 절경이 하도 빼어나 중국의 여산폭포에 비유하기도 했다. 여산(廬山)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삼면이 물로 싸여 있고 서쪽으로만 올라갈 수 있는데, 항상 안개에 휩싸여 있어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명산이다.

달아맨 듯한 한 줄기 물이 은하수처럼 쏟아지니 (懸河一束瀉牛津)
구르던 돌이 만 섬 옥으로 변하였다네. (走石飜成萬斛珉)
내일 아침엔 사람들 논의 그리 각박하진 않으리 (物議明朝無已迫)
물과 돌에 탐을 냈는데 사람에게 탐을 내랴. (貪於水石又於人)

일찍이 남명 조식 선생은 황계폭포를 보고 이렇게 읊었으니, 구르던 돌이 만 섬 옥으로 변했다거나 물이 은하수처럼 쏟아진다는 표현을 보면 이 폭포의 신비로움을 짐작할 수 있겠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황계폭포의 가을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다.

황매산 들머리에 놓인 순결바위모형.
황매산 들머리에 놓인 순결바위모형.

황매산 들머리에 놓인 순결바위모형.
☛여행수첩(지역번호 055)=88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에서 해인사(홍류동계곡)까지 20분 거리. 합천에서 해인사행 버스가 1시간 20분 간격으로 다닌다. 1시간 소요. 대구서부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행 직행버스 운행/ 20분 간격, 1시간 소요. 버스편 문의: 해인사 공용터미날(932-7360). 합천읍내 남정교-합천댐 진입로-합천댐. 88고속도로 고령 나들목→국도33번→ 합천읍→댐 진입로→합천댐, 합천읍에서 합천호까지 16km 거리에 20분 소요. 합천읍이나 거창에서 합천댐까지 군내버스 이용 (1시간 간격). 88고속도로 거창 나들목-합천 방면 24번 국도→합천호 상류 봉산교→합천읍→남정교→우회전→1026번 지방도→용지리→황계리→황계폭포 입구. 마을(황계리) 안 간이주차장에서 폭포까지 400미터. 88고속도로 고령 나들목→26번 국도→쌍림초등학교→합천 방면 33번 국도→합천읍→남정교→우회전→1026번 지방도→용지리→황계리→황계폭포. 영암사지는 1089번 지방도를 타고 가회면 둔내리 버스정류장에서 황매산으로 난 6번 군도를 따라 5.7㎞를 가면 영암사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계단식 논과 단적비연수 촬영장이 있는 산청군 차황면 상법리는 1089번 지방도를 타고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서 율현리 쪽 1006번 지방도를 탄다. 또는 산청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59번 국도를 타고 신기리에서 법평리로 간다. 합천시외버스터미널(931-0142)에서 황계폭포를 지나 합천호 관광지가 있는 대병면까지 50분 간격으로 군내버스가 다닌다. 영암사지는 삼가면을 거쳐 가회면 덕촌리까지 버스가 하루 5번 다닌다. 88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야로면 분기 로터리-거창 방면 24번 국도-봉산대교-1089 지방도로 하금리-황매산. ☛맛집과 잠자리=해인사 입구에 산채정식을 내놓는 식당들이 많다. 향원식당(932-7575), 고바우식당(931-7311), 삼일식당(932-7443) 등. 합천호가 바라보이는 대병면 역평리에 있는 은진송씨 고가(933-7225)는 찹쌀과 솔잎, 쑥누룩으로 빚은 고가송주와 옛날 된장으로 끓인 된장국정식(5,000원)이 별미다. 삼가면 소재지의 삼가식육식당(933-8947)에 가면 합천이 내세우는 한우 맛을 볼 수 있고, 합천호 회양공원 내 황태마을(931-7787)은 황태구이, 황태찜, 매운탕, 아구찜 등이 맛있다. 해인사 관광단지에 해인사관광호텔(933-2000), 가야산국민호텔(931-0095), 진주장여관(932-7216) 등이 있고 합천호 주변에 호수장(931-4824), 황매장(933-7063), 유전모텔(933-1279) 등이 있다. 황매산 영암사지 입구에 있는 황매휴게산장(931-1367)과 모산재식당(933-1101)에서 민박과 식사를 할 수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가야산 관리사무소(932-7810), 홍류동 매표소(934-3140), 청량동 매표소(93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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