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진영
문진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배고픔은 절대 다수의 숙명이었고, 권력자의 가렴주구는 일상이으며, 온갖 질병과 학살, 그리고 잦은 전란으로 사람 목숨 부지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 야만의 정점에 파시즘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종료와 함께 야만의 세기가 막을 내리고, 문명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시민 민주주의 체제의 정착과 노동3권의 보장을 통한 노동자 권익의 향상, 그리고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한 복지국가의 등장과 같은 세기적 개혁은 세계 대공황과 연이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류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문명세계를 발전시킨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위기도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19 위기 역시, 재난의 고통은 항상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나중까지 남아있게 마련이다. 1997년 IMF 경제 위기는 계층 역진적 성격을 가지고 대처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한국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즉 경제위기로 인한 희생과 고통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도시 빈민에게 전담시키고, 대신에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으로 대기업에게는 공적 자금을 과도하게 투자하는 등 위기대처 방식이 계급 역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신화는 막을 내렸고, 계급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각 분야에서 무한대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시장의 분절화가 고착되어, 1차 노동시장 종사자와 2차 노동시장 종사자 간 차이는 거의 신분의 차이만큼이나 크고 구조화되게 마련이다.

더욱이 21세기 한국 사회는 코로나19의 위기에 중첩하여, 저출산 고령화의 가속화와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에 따른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그리고 최근의 자원민족주의의 경향으로 개방형 수출주도 산업국가 한국경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 경우, 자본, 기술, decent job, 여론, 정보, 기회, 능력, 인맥, 그리고 지성마저도 다 가진 소수의 지배계급과 사실상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대다수 피지배계급으로의 분열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 시점은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두 개의 국민으로 양극화되는 현상을 가속화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4.19 60주년 기념사에서 "재난의 크기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지 않으며 장애인이나 취약한 분들에게 훨씬 가혹하다. 코로나19를 겪으며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고 하였다. 재난의 본질을 꿰뚫는 말씀인데, 문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국가정책에 반영할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미증유의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은 '한국판 뉴딜'로 요약된다. 기본 구조는 디지털 뉴딜(디지털 혁신경제 선도)과 그린 뉴딜(친환경 저탄소 전환 가속화)을 양대 기둥으로 하여 경제 성장과 일자리를 창출하고, 두 기둥의 바탕이 되는 디딤돌로 고용·사회안전망 구축을 천명하고 있다(아래의 그림 참조).

                                                     <그림 1> 한국판 뉴딜의 기본 구조

자료: 관계부처합동,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2020년 7월 14일
자료: 관계부처합동,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2020년 7월 14일

현 정부가 한국판 뉴딜의 디딤돌에 해당하는 고용·사회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선, 보다 구체적으로는 '2020년까지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고소득·고재산가 제외)(정부합동발표, 2020년 7월 14일)한다'고 발표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평가한다. 이 글에서는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의 당위성과 그 방안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999년 시민사회의 힘으로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헌법에서 규정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실현을 통해서 사회권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제도적 미비로 인하여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2018년 현재 한국의 빈곤율(균등화 중위소득의 50%)이 16.7%(가계금융복지조사)임에도 불구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비율은 전 국민의 3.4%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현 정부는 2017년 8월 제1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에 따라서 꾸준히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축소하기 위한 시도를 해왔다(아래의 표 참조).

                                               <표1> 문재인 정부의 부양의무자 기준 개선 실적 및 계획

현 정부 들어서 여러 제도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부양의무자 제도가 엄존하는 한, 수급신청자들의 심리적 부담감으로 인하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가 획기적으로 축소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현재 ① 경제위기로 공적 부양의 역할이 증대되는 현실 ② 친족 부양의식이 점점 박약해지고 있는 현실 ③ 비수급 빈곤층이 수급층보다 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 ④ 극심한 저출산 고령화로 부양의무자의 부양부담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⑤ 헌법상의 평등권에 위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양의무자 제도를 대폭 완화하거나 폐지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의 발표대로 '2022년까지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고소득·고재산가 제외)' 방침에서 부양의무가 여전히 존재하는 고소득·고재산가의 기준은 무엇인지를 정해야 한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은 소득과 재산을 따로 보는 컷오프(cut-off) 방식이다. 일정 소득수준(예를 들면 연소득 1억원) 이상이나 일정 재산가액(예를 들면 9억원) 이상이면(A or B), 무조건 부양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득은 낮거나 거의 없는 대신에 주거 재산 등 재산을 어느 정도 보유한 노인이나, 반대로 재산은 거의 없으나 맞벌이 경제활동으로 인하여 소득이 어느 정도 있는 젊은 부부의 상당수가 ‘부양능력 있음’에 해당하게 된다. 이 경우 노인은 재산을 처분해야 하고, 젊은 부부의 경우에는 내 집 마련을 포기해야 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은 부양의무자의 부양능력 판정에 소득인정액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소득인정액(기초생활보장제도 소득평가액 + 낮은 환산율의 재산의 소득환산액)이 '부양의무자 가구의 평균소득 + 수급권자 가구의 중위소득' 이상일 경우에만 '부양능력 있음'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2020년 현재 부모(2인 가구: 중위소득 299만1980원)에게 부양의무가 있는 4인 가구(평균 소득 622만6342원)의 부양의무자가 '부양능력 있음'을 판정받기 위한 월 소득인정액 기준은 약 921만8322원으로 추산된다. 또한 이 기준을 지속적으로 상승시켜서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서 기초보장 급여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기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에 대한 조사도 필수사항으로 하지 않고, 문제가 되는 경우에만 개별적으로 조사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first thing first)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렵게 살아가는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에게 명실상부한 기초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판 뉴딜의 디딤돌에 해당하는 고용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방안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기로 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의료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는 수순을 밟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복지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