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이성계를 도와서 역성혁명에 성공한 삼봉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천도를 단행했다. 삼봉은 고려의 수구기득권세력을 고사시키면서 새 왕조 조선의 개국

1392년, 이성계를 도와서 역성혁명에 성공한 삼봉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천도를 단행했다. 삼봉은 고려의 수구기득권세력을 고사시키면서 새 왕조 조선의 개국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천도가 최상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앞선 시대에도 혁명은 있었다. 실패한 혁명은 역사 속에서 반역의 이름으로 스러졌고 성공한 혁명은 개국이라는 새 명패를 얻어 정사의 한 장을 차지했다.

민중의 봉기이든 무반의 회군이든 혁명은 그 역성의 속성상 필연적으로 무(武)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혁명의 완성은 혁명에 동원된 무력의 거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실패한 혁명의 대부분은 자기제어에 실패한 과잉무력의 패악 때문이었다. 백성은 지극히 약한 존재지만 무력으로 위협해서는 결코 민심을 얻을 수 없음을 삼봉은 꽤뚫고 있었다. 수성에 필요한 제한적 무력만을 남긴 채 삼봉은 '인정(仁政)'으로 새 왕조의 초석을 쌓고자 했다.

혁명의 성공은 새로 얻은 권력의 항구적 수성을 담보로 한다. 권력의 만세수성은 절대적인 민심의 지지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삼봉은 알고 있었다. '어진 정치'를 내세운 삼봉은 "백성은 먹는 것이 곧 하늘이니, 백성의 생활안정과 향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 정치는 민심을 얻을 수 없으며, 그것은 어진 정치라고 할 수 없다." 고 했다.

한양의 새 터 위에 삼봉은 혁명의 완수를 위한 수성의 성을 쌓고 궁을 지었다. 그리고 태조 4년이 되던 1395년 9월 마지막으로 궐문을 달고 그 문을 사정문(四正門)이라 명명하였다.

사정문은 세종 7년이던 1425년 광화문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년)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이던 192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되었다가 6ㆍ25전쟁 중 또 한 차례 소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1961년, 봄이 한창이던 5월의 서울은 흐드러진 꽃향기에 취해 있었다. 16일, 일단의 군대가 한강을 건넜다. 새벽 4시 라디오의 첫 방송에서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로 시작되는 혁명공약이 울려나왔다. 온 국민의 새벽 단잠을 깨우며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위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검은 색안경을 낀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의 육군소장 박정희는 상황을 신속하게 정리해가고 있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그는 혁명에 동원된 무력의 거세와 재배치를 통해서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박정희는 '국가 재건'을 혁명의 첫째 과업으로 내세웠다. 경제의 부흥을 통한 국부의 창출로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국가경제부문에서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거둔 박정희는 혁명정부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권력의 항구적 수성에 이르고자했다. 무엇보다 5.16의 시대적 당위성과 혁명주체세력의 역사적 정통성을 획득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박정희는 모든 국민에게 재건복을 입히고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박정희는 혁명의 역성을 씻어낸 위에 새마을정신으로 무장한 국가개혁의 새 집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새 집에 드나들 문이 필요했다.

1969년, 박정희는 콘크리트 건축물로 된 새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직접 현판의 글씨를 썼다. 바로 지금의 광화문이다.

2006년 1월, 문화재청이 '서울 역사도시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금년 10월부터 공사에 들어가서 현재의 콘크리트 광화문을 헐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오는 2015년까지 이어질 대역사이다. 광화문의 원상복원 및 8,000여 평 규모의 광화문 앞 시민광장 조성, 옛 한양성 성곽의 고증・복원 그리고 전통 한옥마을의 정비 계획 등이 포함된 역대 최대 규모의 고도복원 사업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역사도시 목록 등재를 목표로 서울 도심 전체를 '역사도시'화 하겠다는 문화재청의 의욕이 넘쳐난다.

이번 문화재청의 발표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인 현재의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는 것과 관련한 논란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새로 복원될 광화문의 현판 글씨로 정조대왕의 어필을 집자하는 방안을 밝힌 바 있다.

현재의 참여정부는 스스로 개혁의 주체임을 표방하고 있다. '왜곡되고 조작된' 현대사의 과오를 바로 잡고 과거사 청산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개혁의 적자임을 웅변한다. 현 정부의 시각에서 보자면 삼봉의 혁명은 훌륭한 역사이며 박정희의 혁명은 민주정권 찬탈의 불행한 역사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박정희시대의 왜곡된 역사를 허무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광화문 복원사업이 박정희지우기를 통한 현 정권의 개혁정통성 획득이라는 정치적 복선에서 출발한 구상이라면 이는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오류로 기록될 소지를 안게 된다. 정권의 필요에 맞추어 지우고 싶은 역사는 허물고 소용되는 역사는 다시 세우는 식의 '코드의 잣대'로 고도복원 설계도면의 금을 긋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훗날 새로운 혁명세력이 지금의 시대를 청산하겠다고 나설 빌미는 남겨두지 않는 것이 역사 앞에서 우리가 다시 추스릴 바른 몸가짐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나 광화문이나 그 자리에서 말이 없는데 그 앞을 지나다니는 우리가 늘 요란하다.
저작권자 © 복지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