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 노해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 “혼자서 꾸는 꿈은 단순한 꿈에 지나지 않지만, 여럿이 함께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였는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야말로 여럿이 함께 꾸어서 이루어낸 현실이었다. 사실 이 법이 통과되기 이전인 199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서 ‘전 국민의 기초생활의 보장’이라는 꿈은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먼 나라 사람들의 꿈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태동

필자는 1980년대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면서, 전(全) 국민의 기초생활 보장(national minimum)을 천명한 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에 대해서 배웠고, 그 이상이 전후 유럽 복지국가에 어떻게 실현되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였지만, 도대체 이것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전혀 감이 와 닿지 않았다. 당시에는 가르치는 선생이나 배우는 학생 모두,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피안(彼岸)의 이상향으로만 생각하였다. 하기야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였다. 군부 독재의 폭압 하에서, 농경사회에나 어울릴 단색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경제발전 지상주의 사회에 살면서, 전 국민의 기초생활의 보장이라는 사회개혁이 어디 가당키나 한 꿈이었겠는가.

이러한 사회복지학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 국민의 기초생활 보장’이라는 사회개혁의 꿈이 강의실을 박차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 것은 정확하게 1994년 참여연대 창립 당시 사회복지위원회가 ‘국민복지 기본선 운동’을 천명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1990년대 초 동구(東歐) 진영 몰락의 여파가 우리 사회를 흔들었던 시기로서, 우리 사회에서도 체제 변혁적 계급운동보다는 시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밀착된 개혁이슈들을 쟁점화하고 공론화하는 시민운동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시민사회가 주축이 된 국민기본선 운동은, 전 국민의 기초적인 생활의 보장이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운동의 방식도 비합법적인 투쟁보다는 합법적인 공간에서 합법적인 방식으로 제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또한 운동의 주체 역시 계급관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설득하고 홍보하여 동참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운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민기본선 운동은 1997년 말 미증유의 IMF 경제위기를 겪고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당시 개발연대의 종막을 고하는 IMF 경제위기로 우리 사회가 저성장 고 실업 사회로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생계형 범죄가 창궐하고, 가족해체가 급격히 진행되는 등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혼란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 특히 경제부처에서는 빈곤과 실업의 문제는 우리 경제가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으리란 안일한 사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적 생활보호 사업이나 공공근로 사업 등 미봉적인 대책만을 양산하였다. 이렇듯 개발연대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정부에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참여연대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본격적으로 국민복지 기본선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98년 7월에는 26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여 현재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모태가 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입법청원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 법안은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데다가 기획예산처에서 추가 소요예산에 대해서 난색을 표명하는 바람에 국회 상임위에 부의조차 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해법이 바로 새로운 조직의 건설이었는데, 이 조직이 바로 참여연대, 양대 노총, 경실련, 민변, 여연 등 우리 사회의 주요한 64개 시민사회 단체가 모여서 결성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추진 연대회의(이하 기초연대)’이다.

1999년 1월부터 약 2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그해 3월 정식으로 발족한 기초연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이란 단일한 목표를 위하여 매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고, 특히 이 법을 반대하는 세력들과 치열한 논쟁과 싸움을 거쳐서 결국 1999년 8월 제206회 임시국회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통과되고 같은 해 9월 7일 제정되었다.

국민최저선의 확보

이러한 시민사회 중심의 법 제정 과정은 한국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상당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전의 사회복지관련 법은 주로 정부의 행정입법으로, 법의 주요 골자는 재정적·행정적인 여건이 완비되어야 시행하는 ‘임의 규정’에 의한 행정부의 재량사항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역량으로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시민의 ‘사회적 권리’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생활보호법에서 한 차원 발전한 매우 개혁적인 법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이 법의 기본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구(舊)법 제7조에서는 수급자에 대한 급여는 소득인정액을 포함하여 최저생계비 이상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명시(강행규정)함으로써, 복지국가의 가장 기초적인 제도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 최저선(national minimum)이 확보되었다.

둘째,1944년 일제의 조선구호령 이후 계속 유지되어 왔던 인구학적 구분의 철폐(자활보호대상자에게 생계급여 가능), 소득인정액의 도입, 자활프로그램의 강화, 주거급여의 신설 등을 통해서 제도를 합리화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공공부조제도로 발전하였다. 즉 기존의 생활보호제도가 빈민에 대한 국가의 자선적·시혜적 차원에서 운영되었다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국가의 책임과 국민의 권리가 명시됨으로써 헌법에서 보장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구체적 권리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셋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저소득층의 최저생계보장이라는 전통적인 의미의 공공부조적 성격과 더불어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에게는 빈곤의 덫(poverty trap)에 빠지지 않고 근로의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건부 수급제도와 소득공제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대한 비판

물론 이 법이 한국 사회에서 정착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전 국민의 기초생활의 보장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법 제정 이후에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제정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실제 사업을 운용하는 지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시장주의자와 복지 원리주의자 양측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들어야 했다.

시장주의자들은 이 제도가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에게도 최저생계를 보장함으로써 이들의 근로의욕을 감퇴시켜서 복지병을 유발한다고 날선 비판을 가하였다. 이들은 권리로서 수급권을 보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착되면 저소득층이 너도 나도 수급신청을 하여 최소한 600만명 이상이 수급자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 한편으로, 복지 원리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은 이 제도가 부정수급자 색출에 보다 비중을 둔 ‘부정수급자색출법’이고, 주민등록표 때문에 가정해체가 촉진되는 ‘가정해체촉진법’이요, 조건부 수급자에게는 근로를 강제하는 ‘근로강제법’이고, 정말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요보호자방치법’이라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다행히 시장주의자와 복지 원리주의자 양측의 우려는 그리 심각하게 현재화되지 않았고, 2000년 10월 시행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사회적 자산으로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면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제도는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역으로 물어서, 만약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일반적으로 문명사회와 야만사회를 가르는 기준을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한다면, 분명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한국사회를 문명화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이 제도는 헌법에서 규정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시민에게 부여하고 그 실현을 국가책임으로 규정함으로써,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의 최후의 안전망으로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제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교육을 못 받거나, 병원에서 쫓겨나거나, 밥을 굶으며 거리로 내몰리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국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질병과 가난으로 고독사하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는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라도 완벽한 공공부조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법제정의 취지와 정신과는 동떨어지게 운영되는 측면이 있다.

먼저, 이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제침체 등으로 빈곤층은 늘어만 가는데, 수급자의 수는 전 국민의 3% 수준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별급여체계로 전환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실로 엄격한 부양의무자 기준과 가혹한 재산의 소득환산제도로 인하여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권리성 급여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두 번째로 매년 보건복지부 장관이 고시하는 기준중위소득의 일정비율, 즉 생계급여의 수준(기준중위소득의 30%)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2019년의 경우 4인 가구 중위소득(월 461만원)의 30%인 138만원으로 대도시에서 4인 가구가 한 달을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셋째, 근로능력자수급자들로 하여금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 특히 자활급여는 노동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는 프로그램보다는 단순히 생계급여를 수급받기 위한 조건이행의 측면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발전방향

따라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였던 정신과 가치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제도를 개편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부양의무자 기준을 대폭적으로 완화하여 제도의 사각지대를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둘째, 생계급여의 수준을 동 시대인의 생활수준에 발맞추어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셋째, 근로능력 수급자들이 탈수급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적용하여야 한다. 넷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단순히 금전적인 수급을 넘어서서, 대인 상담 서비스와 지역사회의 정보와 자원을 연결하는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여야 한다.

특히 최근 들어서 기초 지자체가 다양한 사회 서비스를 개발하고 적용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사회서비스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정합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고민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 다섯째, 현재 전 국민의 약 5∼6%로 추정되는 우리 사회의 비수급 빈곤층의 문제를 다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지난 20년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20년 동안 이 제도가 어떻게 발전할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결국 다른 제도와의 정합적인 관계성 속에서 규명되어야 하는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같은 공공부조제도는 한국 복지국가가 발전하면서 점진적으로 비중이 줄어들어 결국은 소멸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엄격한 자산조사를 통해서 일정한 소득 이하의 빈곤층에게만 선별적으로 급여를 제공하는 공공부조제도는 필연적으로 행정수요가 늘어나게 되고, 공정성의 시비가 항상 있으며, 수급자 개인에게는 복지낙인을, 납세자에게는 정치적 불만을 야기하기 때문에, 결코 한국 복지국가의 중심적인 제도가 되지도 않거니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결국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구의 궁박한 욕구에 즉응하는 한시적인 제도로서 역할이 축소되고, 실제 인구 집단별로 사회수당제도나 사회보험제도를 강화시켜서 최저생계 수준을 맞추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전체적인 복지국가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발전방향은 수급조건은 대폭 완화하여 관대한 제도로 운영하되 한국 복지국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작아지는, 내적 관대성의 증가와 외적 비중의 축소를 특징으로 발전될 것으로 전망한다. 즉 사회보험과 사회수당제도로 기초생계를 보장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포용적 복지국가의 원래 의미대로, 난민이나 무국적자, 이주민과 같은 외국인과 주민등록 말소자나 노숙인을 위한 최후의 안전망으로 거듭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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