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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나는 사회복지사로 살고 싶다”
  • 승인 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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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사서 고생한다’고 얘기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 ‘희열’
김병진 사회복지사는 늘 '사람 냄새나는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병진 사회복지사는 늘 '사람 냄새나는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2년 3월 따사로운 봄날, ㅇㅇ시 ㅇㅇ동의 단독주택 반지하 사무실에서 사회복지사의 첫 발을 내딛었다. 대학시절 나의 꿈은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회복지현장에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역자활센터로의(당시 자활후견기관) 입사였다.

열정과 의욕만이 앞서던 새내기 사회복지사 시절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내게 주어진 업무와 나를 바라보고 있던 참여주민들을 위해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고민과 방황 속에 인생의 슈퍼바이저이자 또 다른 사회복지 실천현장(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선배사회복지사를 찾았다. 퇴근길 밤늦은 시간 동네시장 안 포장마차에서 그 선배사회복지사는 아무 말 없이 나의 고민을 한참이나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네가 생각하는 사회복지사는 뭐니?” 너무나도 단순한 이 질문에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왜 사회복지를 선택했는지? 나는 어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은지? 사회복지사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었기에 실천현장에서 사회복지사로서 나의 역할을 고민하기보다는, 단지 내 눈앞에 처한 막막한 현실이 두려워 변명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민의 깊이에 비해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답은 의외로 너무나 단순했다.

주민과 함께라면 ‘고물 주우면 어떠랴’

바로 ‘사회복지사라면 도움이 필요한 분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자’이다. 나의 변화는 바로 지역자활센터에 참여하는 참여주민들의 변화로 이어졌다.

실례로 당시 보건복지부에서 자활사업의 일환으로 재활용사업(자원·음식물재활용)을 장려하고 있었으며, 우리기관 또한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는 자활사업의 초창기로 말이 좋아 ‘자원재활용사업’이지 리어커나 1톤 화물차를 가지고 거리에 버려진 박스나 고물을 수거하여 수익을 올리는 사업이었다. 사회복지사이자 사업담당자인 나를 포함한 당시 자활사업 참여주민 모두가 ‘고물’도 몰랐으며, 더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리어커를 끌고 박스를 줍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사회복지사인 나의 변화는 너무도 단순했다. 당시 지역자활센터 재활용사업 참여주민들의 자립자활을 위해 가장 필요한 역할이 ‘고물에 대한 전문가’라면, 그 역할을 사회복지사의 역할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나는 과감히 전공서적 및 프로그램계획서를 내려놓고 인근 고물상 사장님을 찾아다니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물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고물을 배우다 보니 어느새 나는 기관로고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동네 중심가에 리어커를 끌며 박스를 줍고 있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참여주민들도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발밑에 놓인 종이 한 장 조차 줍지 않던 참여주민이 어느날 왕복4차선 차도를 위험하게 건너가 작은 박스하나를 주어오던 그날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나의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나의 변화를 지켜보고 믿어주었던 동료들 그리고 모자란 나를 끝까지 믿고 따라준 참여주민들 덕분에 나는 그 어떤 사회복지사 보다 열심히 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말로 언급하기엔 너무 커다란 결실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경기도 내 가장 성장률이 높은 자활사업팀, 경기도 재활용사업네트워크 대표선출, ㅇㅇ시 ‘사회복지의 날’ 행사주관, 보건복지부 우수기관 평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지역 지역자활센터 수탁까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에 웃음꽃이 한가득 피어오른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준 가장 큰 가르침은 사회복지사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가치는 역할이나 과업이 아닌 ‘반드시 사람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회복지사’ 바로 ‘사람 냄새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한돌봄사업으로 민관협업의 힘 실감

지역자활센터, 사회적기업, 복지관 등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2010년 ‘경기도무한돌봄사업’이다. 이 사업은 복지사각지대 대상자를 지원하기 위한 경기도의 특화사업임과 동시에 당시 기존 사회복지전달체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두 가지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

첫째, 직접적인 민관협업 구조의 전담센터(팀)구성을 통해 단일기관이 아닌 지역차원의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체계이며, 둘째, 사례관리라는 사회복지실천방법론을 통한 개인별(가구별) 원스톱·맞춤형 접근이라는 것이다. 지역 내 어려운 이웃이 발견되었을 때 단일기관이 아닌 민관이 힘을 합쳐 각 개인별 또는 위기가구에 적합한 원스톱·맞춤형 서비스가 제공된다면 이 보다 더 이상적인 사회복지 전달체계가 또 어디 있을까? 이처럼 사회복지사라면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으로 큰 기대와 포부를 안고 ㅇㅇ시무한돌봄센터 민간사례조정팀장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당시 사회복지현장은 많이 경직되어 있었다. 실례로 주민센터 및 시청 공무원들은 여전히 민원인 응대중심의 역할에 머물러 있었으며 민간사회복지기관들도 각자 기관의 사업수행만으로도 지쳐 지역차원의 네트워크 및 사례관리전달체계 구축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특히, ㅇㅇ시의 넓은 면적, 기반시설 편차 등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과거 한 사람의 사회복지사로서 너무나도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 나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홀로 사시던 와상어르신 한분을 돕고 있었다. 와상환자의 특성상 욕창이 발생했고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당시 사례관리 담당자였던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119응급센터에 신고하여 관내 병원에 어르신을 입원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24시간 간병인 또는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장기간 입원도 쉽지 않았다. 때로는 병원에 하소연도 해보고, 때로는 병원 관계자들과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어르신은 나를 보며 웃어주시며 “괜찮아, 고마워, 미안해”,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가면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어르신을 혼자 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복지관 내부사례회의를 거쳐 약국과 병원, 주민센터 공무원, 아파트관계자 등과 함께 어르신을 돕기 위한 통합사례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회의결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였다. 관내에 입소할만한 전문병원 및 요양원 등이 없었으며, 입소할만한 시설이 있더라도 어르신 또는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동의를 받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나는 어르신의 아픈 과거를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어르신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지만, 정부지원금 마저 자신의 술값과 유흥비로 탕진하는 생활을 일삼다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것이다. 어르신에게는 세상에 단 한명 밖에 없는 피붙이며, 어르신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으려는 것이 혹시나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이야기였다.

점차 심해지는 어르신의 욕창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모습에 사회복지사의 역할이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다. 어르신의 욕창이 너무 심각해 환부를 제대로 쳐다보기조차 힘든 어느 날, 나는 조금 위험한 선택을 하고 만다. 선·후배 사회복지사들의 도움으로 관외 입소가 가능한 믿을만한 요양시설 한곳을 소개받은 나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르신을 지방에 있는 시설로 모시려했다.

이 과정에서 이동을 우려하는 공무원들과 나의 소소한 언쟁과 마찰이 일어났고,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어르신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간다고 했다.” 이날 어르신의 눈물을 처음 봤다. 나 또한 어르신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어르신은 오히려 그런 나를 다독이며 “괜찮다. 고맙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어르신은 가끔 지방 시설을 찾는 나에게 평소처럼 웃어주셨고, 이듬해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르신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끝내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 앞에 존재하는 유일한 단어 ‘사회복지사’

이러한 아픈 경험이 오히려 무한돌봄사업이라는 생소한 사업구조와 힘든 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사회복지사로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나를 지켜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무리 똑똑한 사회복지사라도 혼자서는 위기에 처한 한사람 또는 한 가구를 살릴 수 없다. 하지만 ‘민과 관이 함께하고 하나의 기관이 아닌 지역의 여러 기관이 같은 곳을 보고 함께한다면 그 어떠한 위기상황에 놓인 사람도 가구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이 하나둘 씩 싹트자, 우리가 추구했던 민관협업의 잠재된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위기에 처한 시민 한사람 또는 한가구를 살리겠다’는 민과 관의 의지가 모이자 우리시 무한돌봄센터는 2010년  시 우 수시정정책 ‘시정베스트10’ 2011 경기도무한돌봄사업 최우수기관, 2012년 보건복지부 희망복지지원단(무한돌봄센터) 최우수 지자체로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는 한사람, 한가구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공무원과 유관기관 사회복지사들과 함께한 이때의 소중함과 귀중한 교훈을 잊을 수 없다.

어느덧 1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다양한 사회복지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했으며, 새롭게 시도하고 개척하는 사회복지 실천현장 일선을 뛰어온 것 같다. 지인들은 “고생을 사서 한다”, “왜 그리 인생을 어렵게 사냐?”고 얘기한다. 이런 말을 뒤로 하고 2018년 나는 또 다른 새로운 사회복지 실천현장으로 들어간다. 난 항상 사람들과 호흡하고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노력과 땀의 대가를 믿으며 현실의 뒤에 서기보단 그 앞을 당당히 지켜왔다. 그리고 나는 ‘사람 냄새가 나는 사회복지사’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