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서식 용지에는 성별을 기입하는 난과 함께 언제나 직업을 기입하는 난이 있다. 즉 한 사람의 인격과 직업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대가가 지불되는 취업노동은 빈곤을 퇴치함과 동시에 인간들을 사회질서 안에 묶어두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새로운 노동사회에 대한 뚜렷한 윤곽을 그리지도 않은 채 지금의 노동사회를 떠나고 있다. 다만 임노동에 집중되어 고착된 사회대신 한발 한발 점진적으로 자율적으로 조직된 활동망 안에서 시간주권을 실현시키고 실감 가능한 정치적 자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비전이 제시된다. 즉 취업노동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그 대신 가족노동, 공공의 복리를 위해 생태적으로 순화된 노동이 등장하고 있다.

더 이상의 노동력은 필요없다

1995년 말, 세계적으로 저명한 경영자들이, 냉전을 종식시킨 고르바쵸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재단'을 설립해 주기로 하고 세계 각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 경제학자, 경영자 500여명을 초대하여 세계 최고의 페어몬트 호텔에서 국제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는 21세기 지구촌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문명'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국제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은 인류의 미래를 '20대 80사회'와 '티티테인먼트(titytainment)'라는 말로 함축시켰다. '20대 80사회'는 노동 가능한 인구 중에서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별 문제가 없으므로, 고도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노동비용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마디로 '더 이상의 노동력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 토론회에서 그려진 미래사회는 '탄탄한 중산층도 없고, 저항할 세력도 없는, 오직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만의 부유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잘 사는 20%의 사람들이 가난한 80%의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경쟁 속에 탈락한 실업자들을 누군가가 먹여 살려야 한다는 그들의 결론은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여가를 확대하고 자원봉사를 하게 하고 수당을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로이 교수는 "실업자들을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하고, 자원봉사 활동의 가치를 평가·보상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자"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20대 80사회'의 문제해결 대안으로서 '티티테인먼트 전략'을 제안한 것이다.

세계도처에서 나타나는 경제성장률은 유연한 노동과 불안정한 고용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불안정하게 동요하는 노동의 새로운 양상은 정치적으로 고도의 폭발성을 지닌다. 경제는 성장하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난다. 성장을 택할 것인가? 안정을 택할 것인가? 소수의 풍요 속의 다수의 빈곤, 이것이 오늘 인간세계의 딜레마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정책은 세 가지 길뿐이다. 즉 눈을 감아 버리는 길, 감옥을 더 만드는 길, 그리고 새로운 물꼬를 터주는 길이 그것이다.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공동체노동'이 새로운 대안으로

그러나 티티테인먼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20대 80사회'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시도가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티티테인먼트 전략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근본적 배경을 달리하는 '공동체노동'의 개념이다. 새로운 물꼬로서 공동체노동은 세 가지 측면을 기본적으로 가정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다시 옛날의 노동사회로 돌아가기에는 현재 시장경제주의의 지배적 지위가 너무나 굳건하다. 둘째, 현실적으로 '20-80%' 문제의 해결 가능한 방안은 새로운 사회계약을 모색하는 길뿐이다. 셋째, 새로운 사회계약은 공동체노동을 사회적으로 합의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복지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