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의 희곡에 '금관의 예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굳이 종교적 접근방식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각별합니다. 2000년 전의 예수도 당장의 이익에 따라 서슴없이 굴절하고 왜곡시키는 오늘의 세태를

시인 김지하의 희곡에 '금관의 예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굳이 종교적 접근방식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각별합니다. 2000년 전의 예수도 당장의 이익에 따라 서슴없이 굴절하고 왜곡시키는 오늘의 세태를 꼬집고 있는 이 연극으로부터 우리가 놓치지 말고 읽어 내어야하는 내밀한 이야기는 '진실의 석고화'에 대한 경고입니다. 진리란 '영구불변의 가치'를 필요충분조건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절대명제입니다. 따라서 가시관을 써야하는 것이 예수의 '참'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의 머리에서 가시관을 벗겨내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권리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시관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온 예수의 머리 위에 금관을 씌우는 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예수든 부처든 심지어 살아 숨쉬는 역사마저도 한때의 편의에 의해서 각색하고 편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금관의 윤색된 광휘를 에두른 사람들은 '만유의 왕'을 찬송하며 '금관의 예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기(利己)에 맞춤한 거푸집을 만들어 그 속에 조작된 '참'을 부어넣어서 찍어낸 '허상'을 새 시대의 '진리'라며 그들은 우리를 향해서 마치 구원의 깃발인양 흔들어댑니다. 우리의 거리에는 오늘도 참 많은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세상을 덮을 만큼 무수한 깃발들은 형형색색의 현란함으로 마침내 하늘마저 가립니다.

대표적인 친한파 미국경제인으로 꼽히는 제프리 존스 전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이 우리 한국인에게 던진 고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국은 투명성과 신뢰성 두 가지만 갖추면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두려운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곱씹어 생각해볼수록 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무지 나라 전체의 어느 한 구석 투명한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작금의 나라사정에도 불구하고 정치계를 포함한 이 사회의 소위 지도자그룹 중 어느 누구도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바, 이를테면 '디렉션(방향성)'을 속시원하게 제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한국의 위기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삶의 방향성을 실종한 데에서 오는 총체적 혼돈과 이로 말미암은 전통가치의 붕괴와 질서체계의 전도현상이 바로 우리사회의 환부인 것입니다. 구원을 유혹하는 나부끼는 깃발만 있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정표가 없는 거리는 차와 사람이 한데 뒤엉켜 소통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거리에는 정체구간임을 알리는 적색등이 켜져 있습니다. 소통은 순리에 따르는 명정한 흐름입니다. 밝고 맑은 믿음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소통의 녹색등을 점등할 수 없습니다. 작위(作爲)의 깃발이 난무하는 사회는 맑지 못하고 탁합니다. 신의와 도덕은 밀려나고 속임수와 사행이 판을 치게 마련입니다. 당연히 '투명성과 신뢰성'은 실종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이러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자기비하일지 모르지만 바깥에서 보는 한국의 모습은 이런 정도의 평가를 넘어서지 않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시대를 방불케하는 온갖 장밋빛 구호에도 불구하고 현정부의 '복지한국정책'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투명한 이정표(디렉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용복지예산의 기본적인 틀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복지정책의 사상누각과도 같은 가벼움이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까닭입니다. 국민은 '금관 쓴 복지'를 원하지 않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복지'는 하늘을 가리는 깃발일 뿐입니다. 형형색색의 색실로 수놓은 깃발의 허장성세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국민일반의 삶의 질과 연관되는 복지사업임에랴 작위의 깃발로 하늘을 가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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