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불거져 나와 훼방을 놓는 경우 흔히 '머피의 법칙'을 들먹이게 된다. 어렵게 택일한 야외행사에는 어김없이 비가 온다든지 새옷을 입고 나가면 아니나다를까 흙탕물이 튀긴다든지

꼭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불거져 나와 훼방을 놓는 경우 흔히 '머피의 법칙'을 들먹이게 된다.

어렵게 택일한 야외행사에는 어김없이 비가 온다든지 새옷을 입고 나가면 아니나다를까 흙탕물이 튀긴다든지 하는 지지리도 운 나쁜 일이 유독 나에게만 닥치는 것 같을 때 '머피의 법칙'의 기막힌 우연을 이야기하곤 한다. 한마디로 '잘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된다'는 이 법칙은 불행하게도 중요한 순간에는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머피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던 영국의 로버트 매튜스에 의하면 머피의 법칙은 재수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는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우리들 보편적 삶의 질서의 문제이며, 따라서 세상만사 모든 일은 '머피의 법칙'류의 우연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내 탓'의 인과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무책임한 '네 탓' 만연

한때 카톨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펼쳤던 적이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부딪히게 되는 사소한 시비들, 이를테면 차량 운전 중에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기를 한다든지 복잡한 거리에서 행인과 몸을 부딪힌다든지 하는 짜증나는 일이 일어날 때 우선 언성부터 높일 게 아니라 "제 탓입니다"하고 내가 먼저 몸을 낮추자는 운동으로 당시 카톨릭 신도들은 차량의 유리창에도 '내 탓이오'라는 글귀가 새겨진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톨릭에서 그러한 운동을 하게 된 정확한 배경은 잘 알지 못하지만 대충 미루어 짐작해보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네 탓'의 풍조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돌이켜 보면 '내 탓이오' 운동은 기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정리된다. 이유는 자명하다. 무릇 사회의 도덕회복에는 우러러 따라야할 '본'이 있어야하는 법인데 불행하게도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본받을 '어른'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벌써 얼마동안인지 모르게 허구한 날 무슨무슨 게이트와 무슨무슨 비자금사건으로 날을 지새는 나라에서 어떤 어른이 '본'의 위엄을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굳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류의 진부한 서두를 달지 않더라도 사회의 어른들이 도덕적 붕괴의 나락에 빠질 때 사회전체는 걷잡을 수 없는 모럴해저드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내 탓이오'의 자성(自省)은 사라지고 오직 무책임한 '네 탓'의 핑계만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네 탓'의 핑계가 난무하는 사회는 사랑이 없다. 사랑의 결핍은 꿈의 고갈을 불러오며 이는 소망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세 가지 절대조건으로, 첫째 꿈(소망), 둘째 그 꿈을 성취시키는데 필요한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대상을 꼽았다. 내일에 대한 아무런 꿈(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헛되이 부유하는 인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그 꿈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맞닿아 있다.

일찍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 전역을 돌면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철폐와 흑인의 인권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외쳤던 구호는 다름 아닌 "나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였음을 기억한다.

킹 목사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꿈' 하나로 미국 내 흑인 인권향상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바 있다.

이렇듯 꿈(소망)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다. 그리고 위대한 꿈 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네 탓'의 핑계보다 '내 탓'의 '본'이 내재되어 있다.

어른들이 '본'을 세울 때

다시 말하면 후원의 대상에게 꿈을 전하는 일이며 소망을 나누는 사업인 것이다. 나눔이란 내 것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본디 그의 것을 그의 자리에 되돌려 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쓰기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습한 것을 버리고 새로 학습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앨빈 토플러의 지적처럼 막상 우리는 나눔의 실천에 인색하기만 하다.

매년 400여명이 넘는 어린 생명들이 소아암·백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현실은 우리 모두의 '내 탓'이며 따라서 그들을 정서적·경제적으로 후원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본'을 바로 세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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