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준 성균관대학교 교수
홍경준 성균관대학교 교수

한국 사회보장체계의 혁신이 시급한 과제이다. 제도의 완만한 변화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작동하고 있는 제도는 행위를 규율하는 규칙이며,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만한 변화도 쉽지 않은데, 전면적인 변화는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럼에도 감히 사회보장의 혁신을 주장하는 것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과 4차 산업혁명으로 비유되는 변화는 엄청난 위기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혁신을 가져오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위기 속에서 제도 혁신이 이루어지고, 결국은 위기를 성공으로 전환한 예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밀린 과제 : 한국 사회보장의 특성과 문제점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한국의 생활보장체제가 가지게 된 특성 중 하나는 복지의 낙후성이었다. 복지에 대한 국가책임은 상당 기간 회피될 수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취업이 복지를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취업을 통해 소득을 획득하고, 그를 통해 생애기간 동안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면, 굳이 국가에 의해 조직되는 복지가 필요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은 산업 발전의 과정에서 형성된 노동시장의 분절이 생활보장체제의 이중구조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중심부 노동시장에는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적 규제와 보호가 강화되어 온 반면, 주변부의 노동시장은 그러한 규제와 보호로부터 방임되어 왔다.

사회보장과 관련해서 보면 중심부 취업자에게는 조세 부담을 대가로 한 사회보험의 보호가 점진적으로 제공된 반면, 주변부 취업자에게는 보조금과 조세지출(면세 및 감세)이라는 ‘숨겨진 복지’가 사회보장을 대신해 주어졌다.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민주화 물결은 이러한 분리를 한층 더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동조합의 조직화는 주로 중심부 취업자 위주로 이루어졌고, 신자유주의의 유연화 압력은 층층이 쳐 있는 고용 사다리의 말단을 향해서 주변부를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한국의 사회보장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기존 제도의 보수와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한국이 시장경제의 발전, 민주주의의 확립과 함께 복지국가의 길로 나섰다는 국내외의 평가를 이끌어낼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회보험의 가입대상을 늘리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진행됐고, 2012년부터는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축소하기 위한 재정지원 사업이 두루누리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사회부조 또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도입되고 확장됐다. 2000년에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됐고, 2008년에는 기초노령연금과 근로장려금 제도가, 2009년에는 취업성공패키지 사업이 실시됐다.

2014년을 전후해서는 여러 제도의 확장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기초노령연금이 기초연금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통합형 급여는 맞춤형 급여로, 근로장려금은 대상의 확대와 함께 개편됐다. 2018년부터는 보편적 사회수당인 아동수당이 도입되었고, 기초연금액 인상과 근로장려금의 대폭 확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 기준 완화와 폐지, 한국형 실업부조 도입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간 진행된 산업구조와 노동시장의 변화는 사회보장제도의 확장과 발전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산출해왔다. 대기업의 호조와 중소기업의 침체, 정규직의 소득 증가와 비정규직의 소득 불안정, 상층과 하층 사이의 점증하는 소득 격차, 세계 최저 출산율과 빠른 속도의 고령화는 삶의 불안정을 가속화했다. 주변부 취업자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남아있고, 제도 확장을 체감하는 정도는 불충분하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25년은 한국에서 복지국가의 태동을 지켜볼 수 있었던 시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불평등 증가, 고용 불안 확대가 일상화된 시간이기도 하다.

닥친 도전: 코로나19 위기와 4차 산업혁명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우리 생활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는 구조적인 것이어서, 과거와는 구별되는 뉴노멀로의 이행이라는 규정도 등장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변화에 대한 진단과 분석은 엄청난 양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여기서는 한국은행이 6월에 작성, 배포한 보고서인 ‘코로나19 이후 경제구조 변화와 우리경제에의 영향’을 통해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첫째, 코로나19 위기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정부의 행태에 변화를 초래한다. 개인은 코로나19라는 전염병과 그로 인한 실업과 소득 감소, 활동 제약 등을 체험하면서, 위험회피 성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위기의 진행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 언택트(untact)의 일상화를 통해 4차 산업혁명에 대한 혁신 저항(innovation resistance)은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을 분산하기 위해 기업은 노동 의존도를 축소하는 한편, 혁신을 위한 과감한 투자에는 소극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과 기업의 위험회피 성향 강화는 정부의 역할 확대를 유인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 위험의 분산을 위한 사회보장 등 사회안전망 강화와 관련한 정부 역할은 커질 것이며, ‘큰 정부’는 상당 기간 대세일 것이다.

둘째, 코로나19 위기는 2009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확산해온 탈세계화의 흐름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 기술 안보주의, 노동력 이동과 이민에 대한 규제, 자국 기업에 대한 리쇼어링 등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과 함께 일상화되면서 역내 블록화, 인적교류 약화, 폐쇄적 민족주의 강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코로나19 위기는 저탄소 경제로의 이행 필요성을 증대시킬 것이다. 기후의 변화가 동물 서식지 파괴, 해빙 등을 초래하여 새로운 바이러스를 출현시키는 경로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전환과 함께 탄소세 부과를 통한 세수 증대 필요성도 커지면서 저탄소 경제로의 이행관련한 정책의 현실화 가능성 또한 높아질 것이다.

넷째, 코로나19 위기는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을 가속화할 것이다. 정보처리기술의 발달로 엄청난 양의 정보가 빠르게 처리되면서 정보 재생산의 한계비용은 제로가 되며, 로봇공학 및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이 재화와 서비스 생산 및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디지털 경제의 새로운 기술은 디지털, 물리학, 생물학 등의 경계를 해소함과 동시에 모든 것들의 연결을 가능하게 해 보다 지능적인 사회의 출현을 이끈다. 이 변화의 속도와 범위는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만큼 심대하기에 4차 산업혁명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언택트의 일상화는 사회의 전 부분에서 온라인 활동과 교류,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보편화하면서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을 가속화 할 것이다. 기업과 정부 또한 관련산업과 인프라 투자를 늘리게 될 것인데, 이 또한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은 노동을 통해 생활해왔다. 그런데 디지털 경제는 이 노동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한다. 전통적인 고용 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 유형이 등장하고 확산함에 따라 사회보장과 같은 기존의 사회안전망은 더 이상 사람들의 생활을 안전하게 하는데 기여하기 어렵다. 디지털 경제의 가속화는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겠지만, 중단기적으로는 고용 충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저학력, 여성, 대면 서비스업, 임시일용직, 소규모 사업체에 이러한 고용 충격이 집중될 확률 또한 매우 높다. 결국 코로나19 위기와 디지털 경제의 가속화는 중장기적으로 소득분배의 악화와 한국 생활보장체제의 이중화 문제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어떤 혁신의 길을 가야 하나?

이미 해체됐지만 여전히 유산으로 남아있는 개발국가형 생활보장체제의 문제는 밀린 과제로 남아있다. 이에 더해 코로나19 위기와 그로 인한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는 새롭게 닥친 도전이 되고 있다. 밀린 과제를 해내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닥친 도전까지도 감안해야 하니 참으로 어려움이 크다.

최근 경제 상황의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지급된 재난지원금이 호평을 받으면서, 소득자산조사와 근로에 대한 요구 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일부 연구자와 관련 활동가 사이에서 상상만 되던 것이 현실로 성큼 다가선 것이다. 기본소득제 도입 주장과 관련한 문제의식은 밀린 과제와 닥친 도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기본소득제는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기본소득제는 새롭다 하지만 실은 새롭지 않고, 현실의 문제와 시대 변화의 결과를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며, 폐쇄적 민족주의에 편승해 국가 간 장벽 쌓기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모색해야 할 혁신방안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가야 할 혁신의 길은 사회보장을 개혁해 ‘혁신형 K-사회보장’을 구축하는 것이다.

‘혁신형 K-사회보장’ 구축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

첫째, 노동시장의 공정성 확보가 병행돼야 한다. 디지털 경제의 가속화에 따라 노동시장과 고용에는 심대한 변화가 초래되겠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생활을 꾸리는 방편은 그것이며, 꽤 오랫동안은 여전히 그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혁신형 K-사회보장’ 구축은 노동시장 개선과 함께 추진돼야 한다. 특히 노동시장의 공정성과 관련해서는 동일가치 동일임금 원칙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원칙보다는 상위의 원칙임을 명백히 하고, 그 원칙의 정착과 확대를 위한 임금체계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시장의 공정성 확보를 통한 유연안정성 증진과 사회보장 개혁은 함께 추진돼야 할 과제이다.

둘째, 사회보장, 특히 사회보험 적용 대상은 보편화돼야 한다. 이중적 생활보장체제가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한국의 사회보장은 중심부 취업자 위주로 발전해왔다. 주변부 취업자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혁신형 K-사회보장’은 노동시장에서의 취업형태와는 상관없이 모든 취업자를 적용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사회보장이 대응하는 사회 위험의 다양한 범주는 정비하고 확장돼야 한다. ‘혁신형 K-사회보장’은 취업자의 생활에 곤란을 끼치는 사회위험을 소득 능력의 상실(재해와 은퇴), 소득 능력의 감소(교육훈련과 돌봄), 소득의 상실(실직), 소득의 감소(취업 지위의 하락)라는 4개로 대분류하고, 이에 대응하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사회보험과 사회부조의 패키지로 배치해야 한다.

넷째, 사회보장 혁신은 고용 중심 사회보험을 소득 중심 사회보험으로 전환하고, 다양한 사회부조 프로그램의 재구조화를 통해 추진해야 한다.

이상의 네 가지 원칙을 가진 ‘혁신형 K-사회보장’의 출발점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미 정책 어젠다로 올려져 있는 고용보험 개혁이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사업장 중심 보험료 부과방식에서 탈피해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자본소득 등 모든 소득에 정율로 부과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보험료 기여의 책임을 취업자, 사업자, 정부로하면서 국세청이 일괄 징수하는 방안은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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