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업무는 ‘최소한의 인간다움’ 찾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것

강을 건너려고 배에 올랐다. 한참 저어 가는데 빈 배가 와서 부딪힌다. 아무리 속 좁은 사람이라도 빈 배를 보고 화내거나 욕하진 않는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배에 타고 있다면 이내 고함을 친다. 고함을 쳐도 듣지 못하면 또 고함을 치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이젠 욕이 뒤따른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심리학 용어에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는 게 있다. 귀인(attribution)이란 어떤 행동을 보고 이런 행동이 나오게 된 다양한 원인들 중 어느 원인을 그 행동에 귀속시킬지를 추론하는 과정이다.

귀인에는 ‘상황적 귀인’과 ‘기질적 귀인’이 있다. 상황적 귀인은 어떤 상황 때문에 그런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고, 기질적 귀인은 그 사람의 본질이 원래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내가 지각했을 때는 언제나 지하철이 늦게 왔고 도로가 막혔다 하고, 타인이 지각했을 때는 그 사람이 원래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판단해버린다. 나의 행동은 상황적인 탓으로 돌리고 타인의 행동은 그 사람의 기질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채 직업상 다른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 직무를 행하는 것을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라고 했다. 전화상담원, 승무원처럼 직접 고객을 응대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늘 자기감정을 관리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2009년 『감정노동』으로 번역된 책의 원제(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가 모든 걸 얘기해준다.

사회 속 ‘관계’에 대하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한다. 사회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사회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에서 무인도에 고립된 주인공이 배구공에 ‘윌슨’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늘 옆에 둔 채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관계는 늘 위태롭다. 내가 아닌 타인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나는 타인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이해받을 수 있는지, 우리는 늘 나와 타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직장인들이 가장 반기는 회식자리가 상사 없는 회식이요, 직장에서 가장 사랑 받는 상급자가 회식자리에 자기 대신 신용카드만 맡겨주는 상사라고 하지 않나.

사회복지공무원이 된 지 이제 2년이 되어간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또 알아야 할 것은 산적한데, 민원인들의 질문은 대개가 내 근무연수로는 답할 수 없는 다양하고 해결하기 힘든 것들 투성이다. 게다가 이성적인 대화나 접근으로 대하기 어려운 일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짜고짜 고함을 치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급여감소 예정’을 ‘급여중지 결정’으로 오해하고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찾는 사람도 있다. 허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힘들고 버거운 상황만 이어지진 않는다. 성난 황소의 얼굴로 날 찾아왔다가 내 나름의 부드럽고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에 온순한 토끼처럼 미소 짓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배로, 동료로, 후배로, 남편으로, 모든 인간은 복잡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각각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언행을 그때그때 할 수 있다면, 관계 속에서의 갈등은 자연스레 해소된다. 그러나 한 개의 인격체가 무수한 역할을 맡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태생적 불협화음은 늘 상존한다. 그래서 미소 짓는 남편의 얼굴을 기대한 아내에게, 남편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여전히 품고 있는 찡그린 김 대리의 얼굴로 대하기 마련이다. 갈등은 그렇게 시작한다.

타인의 입장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자세로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항상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봐야 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이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할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상황도 있다. 그럼에도 타인에 대한 이해를 멈추지 않다 보면 스스로의 삶의 자세, 마음가짐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테다. 나도 언젠간 내가 그렇게 욕했던 상사가 된다.

엄밀히 얘기한다면 이 세상에 ‘감정노동’이 아닌 일은 없을 테다. ‘인공지능(AI)도 과연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진 4 차산업 혁명의 시대에, 감정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일이란 언제나 ‘감정노동’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일이 감정노동이라면, 우리는 결국 일을 하는 데 있어 내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 타인의 감정에 대한 성찰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복지업무는 최소한의 인간다움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때문에 복지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처한 유무형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먼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충분히 가능하다면, 때때로 밀려오는 야근과 더불어 수급 탈락에 대한 사람들의 항변과 거친 말과 행동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런 다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자 하는 나조차도 내일 수급중지 안내 전화를 할 때 행여 발생할지 모를 난감하고 난처한 상황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심장이 지끈거려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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