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
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

‘복지국가’에서 ‘복지사회’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복지는 빈곤 등 산업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혁신수단의 일환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중반 산업혁명 발상지인 영국이 미국, 독일 등 신흥공업국과 경쟁에서 밀리게 되면서 도시지역에서 빈곤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부스(Booth)와 라운트리(Rowntree)의 빈곤조사, 자원봉사자연합체인 자선조직협회(COS) 그리고 지역사회운동인 토인비홀(Toynbee Hall)은 민간 차원 최초의 사회복지활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민사회가 발달된 영국은 민간이 복지 분야를 선도한 반면, 정치적 통일로 강력한 중앙권력이 형성된 독일은 비스마르크 재상이 사회보험이라는 혁신적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정부가 복지정책 수립 및 집행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독일에서 시작된 사회보험제도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영국 처칠 수상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최초의 복지국가 청사진인 ‘베버리지 보고서’를 만들게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세계경제 호황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서구 선진국들은 더 나은 ‘복지국가’를 만들려는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반적인 복지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복지재정 팽창으로 ‘큰 정부’와 이에 따른 비효율이 새로운 도전과제로 등장했다. 복지국가와 큰 정부에 대한 반작용으로 1980년대부터 이른바 ‘신(新)자유주의’가 부상하면서 복지 분야에서 민간의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블레어(Blair) 노동당 정부는 총리실에 ‘제3섹터청’을 신설하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회금융시장의 활성화를 통한 혁신적 민간복지활동을 지원하였다.

2010년 집권한 보수당 정권에서도, 비록 명칭을 ‘제3섹터’에서 ‘시민사회’로 바꿨지만, 사회금융 시장을 통한 민간복지활동 활성화 노력은 지속되었다. 정부 중심의 ‘복지국가’를 시민사회와 기업 등이 모두 참여하는 ‘복지사회’로 개편하려는 노력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 호주 등 자유주의적 복지국가는 물론 독일, 프랑스 등 보수주의적 복지국가와 스웨덴, 덴마크 등 사회민주적 복지국가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사회복지의 사회혁신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사회혁신의 주체로서 사회적 기업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회금융의 활성화는 물론 IT 등 기술혁신을 복지분야에 접목시키려는 노력 역시 덴마크 등 북유럽국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 일본과 같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여 경제발전 수준에 상응하는 사회복지 발전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1998년 사회권에 근거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추진되었고,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도입을 계기로 각종 사회보험제도가 성숙단계로 진입하였다. 또한 1952년 한국사회복지협의회 설립으로 꾸준히 발전해온 사회서비스 분야 역시 1989년부터 정부 차원의 지원이 강화됨으로써 ‘경쟁력을 갖춘 서비스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 한국, 대만이 주축이 된 ‘동아시아형’ 복지국가는 사회보험제도에 기초하는 ‘보수주의형’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정부 못지않게 민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형’을 가미한 ‘혼합형’ 복지국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형’ 복지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발전이 복지발전을 선도했다는 점인데, 불균형 발전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경제발전으로 인해 복지발전에 필요한 재원 조달을 용이하게 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복지국가 위기’를 경험한 유럽국가와는 달리 ‘동아시아형’ 복지국가는 1997년 외환위기는 물론 2008년 세계금융위기 과정에서도 복지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복지국가의 성격은 인위적 정책 설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그 나라의 역사적, 정치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여건이 빚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형 복지국가를 그리는데 있어서도 기존 ‘동아시아형’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형’은 복지와 경제가 상호보완적이고, 정부와 민간 부문이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역할 분담을 하기 때문에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한 ‘세계화 시대’에 적합한 복지국가 모형이라고 하겠다.

특히 강조되어야 할 점은 ‘경제는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역할분담 원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는 복지국가의 본보기인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복지 분야에서도 기업을 포함한 민간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복지재정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사회혁신을 통해 복지사업의 사회적 성과가 극대화되는 생태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만 강조되는 ‘복지국가’에서 정부와 민간의 협치(協治)에 기반한 ‘복지사회’ 개념으로의 사고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공헌활동은 개인을 행복하게 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인간의 사회성 때문이라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그리스 정치사상은 윤리적인 것을 그 이념으로 하였고, 국가는 시민을 공동체에서 윤리적으로 결속시켜주는 교육기관 역할을 했다. 중세기에는 빛을 보지 못한 ‘시민사회’가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서양문화의 중심으로 부활하였다. 정치학자 브루스 시버스(Bruce Sievers)는 법치주의, 개인의 자유에 더해 자선 및 박애 등 사회공헌활동을 시민정신의 기본요소로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동물이지만 이타심 역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자유주의경제 창시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물론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인간의 이타적 행동 역시 이기심의 또 다른 형태로 인식하고 있다. 이에 더해, 고고학자이며 종교학자인 배철현은 인간의 이타심이야 말로 오랜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은 단 하나의 이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미성숙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오랜 기간 모성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난다. 이러면서 인간에게 공감, 배려와 같은 이타심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타적 본능에 근거한 사회공헌활동은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해야하는 매우 기본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이 사는데 가장 기본적인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에, 환자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그를 정신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는 내면적 삶을 열망하는 사람이 외형적인 삶에 관심 있는 사람보다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더해, 교육전문가 켄트 키스(Kent Keith)는 설문조사를 통해 응답자의 대다수가 권력이나 물질적 부(富)보다는 봉사, 기부 등 남을 돕는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인간은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삶의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진다는 것이 이 분야 연구의 공통된 결론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랑호르몬’이라고 하는 옥시토신(oxytocin) 실험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은 봉사활동을 한 그룹이 개인 취미활동을 한 그룹보다 옥시토신이 더 많이 생성되었음을 발견하였다.

우리나라는 행복지수에서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UN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건강수명, 1인당 소득 등 행복의 객관적 지표는 한국이 최상위권에 속하나, 자선활동, 사회적 지지 등 주관적 지표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는 한국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반면, 출산율은 최저 수준이라는 사실로도 입증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차원에서 사회공헌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은 행복도를 높이고 우리 사회를 좀 더 따뜻하고 훈훈하게 하는데 중요한 정책수단이 될 것이다.

사회공헌활동은 기업에게 이익이 된다

1953년 하워드 보웬(Howard Bowen)의 저서로 부각된 ‘기업사회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오늘날 기업 경영전략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CSR은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중심축이 되고 있다. UN은 지속가능경영의 3대 원칙으로 기업의 경제적 성과, 사회적 성과, 그리고 환경적 성과 간 균형과 융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국제표준협회(ISO)는 2010년 사회공헌에 관한 국제규정인 ‘ISO 26000’을 제정·발표했다. 국제표준협회는 기업이 권고사항인 ‘ISO 26000’을 실천함으로써 기업의 신뢰도를 높여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안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제3의 길’은 복지국가의 위기와 세계화 시대를 맞아 정부 역할을 강조하는 진보진영이 내놓은 대안이었다. 반면, CSR은 환경 파괴, 양극화 심화 등으로 기업활동과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는 가운데 시장과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는 보수진영이 제시한 대응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포터(Porter)와 크래머(Kramer)는 단순한 CSR을 넘어 기업이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사업을 찾아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공유가치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 이론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업사회공헌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대다수 기업들이 CSR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펴낸 ‘2018 사회공헌 백서’에 의하면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의 58%가 사회공헌 전담조직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또 229개 주요 기업 및 기관의 사회공헌활동비 총액은 2018년 현재 2조7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복지협의회는 사회공헌백서와 계간지 출간에 이어 2019년 하반기 ‘지역사회공헌기업·기관 인정제’를 추진함으로써 기업사회공헌활동을 선도할 계획이다.

사회혁신 생태계 만들기

사회공헌 가치 창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사회적 가치 창출을 전담하는 비영리기관(NPO) 경영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비영리기관은 영리기업보다 한층 높은 차원의 사회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경영을 그저 잘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매우 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영리기관은 우선 단순 기부자를 사회공헌자로 바꿔야 하고, 지역사회에 공통의 목표를 부여함은 물론 무보수 자원봉사자에게 사명의식을 불어넣어 주어야 하는 등 매우 어려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CEO의 역할이 중요하다. 비영리기관 CEO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카리스마보다는 사명의식이라는 게 이 분야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또한 NPO의 사회적 성과를 가급적 계량화하여 이를 경영과정에 반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적 성과의 중요성과 함께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분야가 ‘사회성과투자(social impact investment)’다. 재무적 수익과 함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성과투자’는 최근 급속히 성장하여 2017년 현재 그 자산 규모가 114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성과투자’가 아직 태동기에 있지만, 최근 정부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기관이 힘을 모으는 것을 ‘협력의 힘(collective impact)’이라고 하며, 각자 독자적으로 일을 수행하는 것을 ‘단독의 힘(isolated impact)’이라고 한다. 후자가 전자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기관 간 불필요한 경쟁심만 유발한다는 것이 이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카니아(Kania)와 크래머(Kramer)의 주장이다. 이들은 ‘협력의 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어젠다와 성과 측정 시스템이 있어야 하고, 참가자 간 긴밀한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보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려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여러 주체들이 협력하여 ‘협력의 힘’이 발휘되는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복지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