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성 중앙대학교 교수
김교성 중앙대학교 교수

이제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심심치 않게 논의되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어떻게 ‘몽상가적 아이디어’에서 고민해 볼 만한 ‘새로운 전략’으로 부상한 것일까? 국내 기본소득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2009년임을 감안하면 불과 10년의 시간동안 벌어진 일이며, 변화의 기점은 2016년으로 추정된다.

먼저 ‘4차 산업혁명’과 ‘고용 없는 성장’ 담론에서 비롯된 위기의식과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가 대중의 관심을 추동했다. 동시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이 구현되면서 정치·사회적 가시성이 높아졌다.

2017년 대선경선과정에서 여러 후보들이 기본소득과 사회수당을 주요 공약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 견해와 핵심 이슈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 진 것도 같은 시기이다. 확실한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본소득이 회자되고 있으며, 생각과 논점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전략의 필요성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왜 이렇게 21세기 ‘새로운 전략’으로 논의되고 있는 걸까? 이유는 크게 세 가지 문제인식에서 기인한다.

첫째, 일자리의 변화이다.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명명한 ‘4차 산업혁명’은 아직도 개념적 논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융합을 통한 초연결지능사회로의 변화를 통해 ‘노동 없는 미래’와 일자리의 양적 감소에 대한 비관론이 핵심 내용이다. 후기산업사회 들어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표준적 고용관계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고용형태들이 등장하고 있다. ‘크라우드 노동’과 ‘주문형 앱 노동’ 등 불안정 노동의 확산도 플랫폼 경제체제 안에서 가속화되고 있다.

둘째, 자본주의의 성격변화이다. 일자리 변화의 구조적 원인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 상품화된 노동력에 의해 가치를 창출하던 산업자본주의와 달리 인지자본주의에서는 지식과 정보에 의해 가치가 창출되며, 자본축적 방식의 사회적 성격도 강화된다.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가치 생산과 분배방식의 질적인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셋째, 복지국가의 핵심패러다임인 노동중심성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획득된 (임금)‘노동’중심 사회가 유동화되면서 ‘소비’중심 사회로 변화되었으며, 유동적 근대사회의 개인화 현상은 욕구의 유동성을 추동하였다. 따라서 표준화된 생애주기에 맞춰진 현재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체계를 개인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하여 다변화 시킬 필요가 있다. 동시에 고용형태의 다각화에 따라 변화된 노동시장 구조와 현 사회보장 체계의 부정합성 역시 크게 부각되고 있다.

기본소득은 비교적 단순한 개념적 정의를 갖고 있다. ‘ 자산조사나 근로요구 없이 모 든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주기적 현금급여’를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유 급노동에 종 사한 사 람에게만 지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보험과 다르며, 자산조사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부조와 구별된다.

사회수당, 참여소득, 사회적 지분급여, 부의 소득세(NIT)도 변용된 형태의 기본소득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수당은 보편성, 참여소득은 무조건성, 사회적 지분급여는 정기성, 부의 소득세는 개별성과 지급방법 측면에서 변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지지하는 궁극적 가치는 ‘자유’이다. 기본소득의 이론적 기반을 다진 판 파레이스(van Parijs)는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Real Freedom for All)’라는 개념을 통해 분배정의를 기회의 평등으로 정식화했다. 스탠딩(Standing, 2017)도 자유를 위한 정책원칙으로 ‘가부장주의 검증 원칙’과 ‘자선이 아닌 권리원칙’을 제시함으로써 기본소득의 화폐적 가치를 넘어선 해방적 가치를 강조했다.

새로운 사회적 상상의 확장

전 세계적으로 작은 단위의 기본소득 실험들이 진행 중이다. 1960~70년대에 미국의 몇 개 주와 캐나다 마니토바 주에서 실시한 실험과 같이 대체로 빈곤과 불평등완화 전략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미국 알래스카 주에서는 1970년대 후반 천연자원 발견 후 알래스카 영구기금(APF)을 조성해 지금까지 기금 운용의 수입을 모든 주민들에게 할당하는 기본소득을 실시하고 있다. 연간 급여수준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약 50년간 지속되며 알래스카주를 미국에서 가장 평등한 주로 만들었다. 2008년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시범사업과 2003년 브라질의 볼사 파밀리아와 같은 전통적 사업들은 빈곤완화 효과와 인적자본 향상에 집중하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2016년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 부결로 촉발된 최근 기본소득 실험들은 자동화에 대한 관심과 기존 사회보장 개혁 전략으로 검토되고 있다. 중앙정부 최초로 2년간 실업수당 수급자에게 월 560유로를 지급하는 모델을 실험 중인 핀란드는 실업수당 개혁에 목적을 둔 반면, 네덜란드에서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개편을 목적으로 한 기본소득 실험을 시행하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도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3년간 NIT 방식의 실험을 수행했으나 최근 조기중단 했다. 미국 와이콤비네이터 리서치(Y Combinator Research)는 자동화 이슈에 대한 관심으로 순수 민간재원을 통한 실험을 계획하고 있으며, 기본소득이 사회·심리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의 스톡튼(Stockton) 시에서도 자동화 이슈에 동인되어 실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약 300년간 이념체계로 논의되어 온 기본소득이 최근 들어 실현 가능한 제도로서 검토되고 있는 상황은 ‘새로운 사회적 상상’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그 긴 세월동안 기본소득을 둘러싼 피할 수 없는 논쟁들도 존재하는데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체제변혁에 기여할 수 없으며, 둘째, 기본소득은 게으른 베짱이에게도 지급하므로 정의롭지 않고, 셋째, 젠더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없다는 지적이다.

새로운 삶의 조건

첫 번째 비판은 주로 노동계급 운동진영 내에서 제기되어 왔는데, 핵심 내용은 기본소득 구상으로 자본주의 체제 전환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노동자의 임금수준을 하락시켜 노동의 ‘상품성’을 강화할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기본소득 구상은 유급노동중심주의를 완화시키는 기제로서 (유급)노동 밖에 존재하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며, 나아가 새로운 삶의 조건들을 탐색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 비판은 주로 보수주의 진영에서 제기되었는데 기본소득이 ‘노동윤리’를 훼손시켜 무임승차하는 사람을 양산할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은 노동가치의 일면만 부각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필요소득의 충족에도 있겠지만, 다양한 목적과 삶의 이유와도 연계된다.

기본소득은 질 낮은 일자리, 저임금·저숙련의 노동을 거부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의 자율성을 높이는 기제로도 기능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노동중심사회는 생산(유급)노동의 재생산(무급)노동에 대한 무임승차를 은폐하고 있으며, 기본소득은 다양한 노동(활동)을 인정하고 장려한다는 점에서 삶의 가능성을 높이는 기제로 활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본소득의 ‘호혜성’ 이슈는 재생산노동에 대한 생산노동의 무임승차 ‘문제’보다 심각한 것은 아니며,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의존적’ 존재임을 인정할 때 이러한 비판의 단선성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은 젠더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의 노동시장과 가족구조에서 기본소득의 지급은 여성의 유급노동 유인을 감소시켜 가사영역에 머물게 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로 인해 성별(노동)분업 이데올로기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의 맹점은 노동을 구성하는 ‘남성 중심적 젠더규범’에 관심을 갖기 보다 ‘유급고용’ 자체에만 관심을 둔다는 점에 있다(Mckay, 2001). 기본소득은 오히려 유급노동시간에 제약이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독립을 촉진시키고, 무급가사노동의 개인·사회적 가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동시에 기본소득이 너무 중립적이어서 돌봄을 보상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기본소득의 중립성을 젠더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인식하고 있다. 기본소득의 보편성과 무조건성은 어느 누구도 노동자 혹은 돌봄제공자로 구획하지 않고 동등한 시민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 젠더편향을 가정하는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의 단점을 극복하는 동시에, 국가와 시장에서 보상하지 않는 돌봄노동의 일정부분을 가치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의 구체적 논쟁은 구상단계에서 보다 실행단계에서 격화된다. 가장 큰 논점은 기본소득의 재정적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일정 수준의 현금을 지속적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제도의 특성상 많은 재원이 소요되며, 생산성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하거나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걷어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수준으로 나눌 수 있을 지는 ‘어떤’ 기본소득을 설계하는 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략적인 재원마련 방법에는 ‘조세형’과 ‘공유부배당형’이 있으며, 두 방법은 근본적인 가치와 철학이 상이하다. 문제를 무엇으로 인식하는 가에 따라 소득세, 불로소득 종합과세, 생태세, 기본소득세 신설 등의 논의가 진행될 수 있으며, 최근 4차 산업혁명과 공유경제 논의에 근거한 사회적 부의 착취를 문제시 한다면 공유자산에 대한 배당금 차원에서 기본소득이 설계될 수 있다.

현재까지 제안된 국내 기본소득 모델 중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것은 2017년 대선경선과정에서 제안된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안이다. 이러한 기본소득과 관련된 제안들은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정치적 논의와 사회적 실험 등의 토론과정을 거쳐 발전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가능성이 재정적 실현가능성의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유를 원하는가?

당신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Illich, 1978)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얼마나 이러한 삶의 조건들을 보장하고 있는가? 경제학자 케인즈(Keynes)는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서 100년 뒤에는 생산성의 증가로 주당 노동시간이 15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경제적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기준 OECD 국가 중 연평균 노동시간이 세 번째로 길며, 건강·행복·안전과 관련된 각종 사회지표에서 절망적인 결과를 보이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예상이 어긋난 이유를 사람들이 일을 좋아해서, 더 많이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쁨이 사회적 지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케인즈는 성장의 과실이 자본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지독히도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확대해 온 자유는 생산성의 그늘 아래 유연화와 상품화를 가속화한 ‘신자유주의’적 자유였고, 설상가상으로 기술혁신을 통해 인류의 삶은 더욱 피곤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원자화된 개인이 깊은 소외를 깨닫고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불안의 원인을 찾고 다시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기본소득은 그러한 ‘위기’를 드러내는 의제다. 당신은 어떤 자유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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