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우리 이웃’ 그리고 ‘함께해야 할 이웃’ 노숙인

임은경 사무처장(한국노숙인복지시설협회)
임은경 사무처장
(한국노숙인복지시설협회)

노숙인의 인권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사람(人)’에게 두는 가치가 어느정도의 수준인지 알고 싶다. 흔히 취약계층의 인권을 얘기하면 사회 환경이 바뀌어야 하고,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주장이야말로 여전히 아랫돌 빼서 윗돌을 궤는 사고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는데 노숙인 인권, 장애인 인권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느리고 더디더라도 노숙인, 특히 노숙인 인권이 매개가 되어 세상을 바꾸자는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희망을 담아본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시설에 거주하는 노숙인에 대한 인권이다. 시설에 거주한다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인권적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특별한 계층임에는 분명하다.

우리가 흔히 보게 되거나 떠올리는 노숙인은 거리에서 남루하거나 누추한 행색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사람 정도가 일반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노숙인 시설에는 어떤 모습의 노숙인이 거주하고 있을까? 일반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노숙인복지시설에가 본 사람이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외다’라는 말을 한다. 그 이유는 고령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거리의 사람들만 노숙인이 아니란 얘기다.

대도시의 큰 역 주변에서만 볼 수 있는 노숙인은 농촌 시골마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2011년 전국 주거취약계층 실태조사에 따르면, 주거로써 현저히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곳에 거주하는 인구가 26만명으로 조사된 바 있다. 그렇듯이 우리 주변 곳곳에는 언제든 거리로 혹은 시설에 갈 수밖에 없는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외면하기 힘든 현실이다.

노숙인 시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

노숙인복지시설에 입소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누가 그 노숙인을 발견했느냐, 그 지역에 노숙인복지시설이 존재하느냐도 입소 이유에 크게 작용한다. 경로는 그렇다 치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노숙인복지시설 입소자들은 사회적 지지체계가 없거나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그 어떤 지지체계도 없기 때문에 최후의 보루로 ‘시설’을 선택한다. 혹자는 선택권 없이 입소하는 것 자체가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죽지 못해 선택한 마지막 거처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시설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지체계가 되어 지역사회로의 건강한 복귀를 돕는다. 심지어는 치열하고 간절하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련의 인권침해 사건이 침소봉대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난해 8월 말에 터져 나온 이른바 ‘대구광역시립희망원 인권침해 사건’은 다시 한 번 시설보호의 폐해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왜 ‘시설’인가. 우리 사회에 시설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기에 잊을만하면 인권침해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과거 형제복지원 사건을 두고 어느 신문기자의 고백이 그랬다.

“그 괴물과도 같은 사건은 시설 운영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암묵적 합의, 즉 정부와 시설과 언론과 국민의 모르쇠가 만들어 낸 결과물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3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만큼 우리 사회가 변했고 국민정서도 변했다. 그리고 감추고 숨기고 소위 ‘암묵적 합의’로 묻어 두고 가기에는 꽤 투명한 사회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 대해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미봉책에 가깝다. 게다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도 없어 보인다. 현장과의 소통 없이 이루어지는 정책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고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되고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는 애시당초 갖기 어려웠던 것도 현장의 시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사회문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간과하지 말 아 야 할 것이 있다면 사건과 현상에 묻혀서 정작 ‘사람’이라는 본질을 잊은 채 다시 그 어떤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설이라는 시스템은 그래서 늘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형제복지원’과 이제는 이별할 때

‘형제복지원’은 노숙인복지 분야의 악령과도 같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이기도 하다. 그 악명이 어디 노숙인 분야 뿐이겠는가. 사회복지계의 그 어떤 인권침해 사건이 벌어지기만 하면 1987년의 ‘형제복지원 사건’은 좀비처럼 살아난다. 인권 침해 사건은 단 한 명의 피해자라도 존재한다면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앞으로 또 다른 인권침해 사건이 나와서도 안 되겠지만 혹시 유사한 사건이라도 형제복지원, 대구광역시립희망원이 회자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픈 과거의 반복은 당사자, 관련된 사람, 그리고 모든 국민의 마음을 때리고 또 때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데자뷰처럼 나타나는 현상이더라도 굳이 과거의 일을 다시 꺼내어 보는 것은 낡은 사진을 꺼내어 옛날을 추억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이제는 그 어떤 경우라도 형제복지원을 다시는 꺼내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시설 인권침해 사건은 우연처럼 대형시설에서 일어났다는 것, 그것은 놓쳐서는 안 될 핵심사항 중 하나일 것이다. 대형시설은 여러 면에서 매우 유용하다. 운영 면에서 규모의 경제로 인해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은 굳이 계산기를 두들기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가령 1000명의 생활인을 돌보는 1개의 노숙인복지시설을 장애인복지시설 기준(시설당 최대 30인)으로 분해한다면 30개 이상의 시설이 필요하고 종사자의 수는 단순히 30배가 아닌 그 이상이 된다. 종사자의 수도 수지만 관리운영비 또한 노숙인복지시설 수준이 30% 내외의 낮은 수준에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천문학적 숫자가 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시설은 계륵과도 같다. 그 효용에 빠진 정책은 마치 개미지옥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시스템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대형시설을 우리 사회에 존재케 했던 소위 4자(정부, 시설 운영자, 언론, 국민) 간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면 이제 그 4자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비용이 들더라도 해야 할 일이다. 굳이 사회의 책임, 국가의 책임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인권침해 사건을 놓고 가슴 아픈 얘기를 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그야말로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 할 때다. 정책적으로는 예방이 우선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답이다. 소극적 예방으로는 대형시설을 소규모화 하는 것, 적정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종사자를 배치하는 것, 다양한 프로그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노숙인의 인권이라는 화두가 단순히 그들만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시키는 일에 그쳐서는 미흡하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진정한 예방이 될 것이다. 그 시작은 우리 중에 누구라도 ‘노숙인’이 될 수 있다는 명제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거리에서 노숙하든, 노숙인복지시설에 거주하든 간에 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은 제 각각 사연을 가지고 있고, 알고 보면 어제의 우리 이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쳇말로 놀라운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왜’그렇게 됐는지 노숙원인을 조사한 연구보고서도 있지만, 우리는 ‘왜’보다는 ‘어떻게’ 그들이 다시 우리 이웃이 될 수 있을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함께할 이웃’이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월간 복지저널 2017년 12월호(통권 112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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