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인구의 급속한 증가추세 역시 세계 최고 수준에 드는데, 그와 함께 다양한 영역에서 노인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특히 '노인빈곤'이나 '노인 학대'가 심각하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
김근홍 강남대 교수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복지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어 왔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사회적 책임인가? 아동복지가 아동을 위한 것이고, 노인복지는 노인을 위한 것일까? 그렇다 할 수도 있고 또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우선 복지정책의 대상이 그들이란 점에서 그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 복지정책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정책으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한없이 이타적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기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복지는 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노인을 위한 사회는 없다?

 

평균수명의 연장과 출산율 감소에 따라 노인인구의 비율이 가파른 증가 추세고,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의 진입 속도는 전대미문일 정도다. 우리의 자랑인 세계 최고의 추구가 어느덧 세계 최악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시멘트를 발라서라도 세계 최대의 것을 만들고, 사회에 무슨 덕이 될지 모르더라도 기네스북에는 일단 오르고 봐야 하는 분위기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노인인구의 급속한 증가추세 역시 세계 최고 수준에 드는데, 그와 함께 다양한 영역에서 노인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특히 '노인빈곤'이나 '노인 학대'가 심각하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가 된지 오래다. 그런데 사회 전체로 볼 때 옛날보다 물질적으로 많이 나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가난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빈익빈부익부로 이어지는 분배 시스템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 속도의 사회 변화 과정에서 노인부양의 문화와 의식이 달라진 탓도 있다.

 

다시 말해 삶의 가치관 변화 탓이기도 하다.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를 모시려던 효(孝)의 가치관이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모도 버릴 수 있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가치관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적, 경제적 효율성을 핑계로 내세우기도 한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효도와 같은 가치관은 없어져야 마땅한 미신 같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걸까? 그러면 부모와 같은 노인을 향한 폭력도 또 가난으로 몰아넣는 것도 가능한 것일까?

 

공동체란 굳이 사회계약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저마다 혼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다. 효도 역시 공동체 이념의 하나로서 권장되고 교육되었겠지만, 오늘날엔 효율성과 실적주의가 더 큰 가치관이 되고만 것 또한 공동체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가치들이 미신처럼 타파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그 물결 속에서 공동체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기피대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자신과 좁은 의미의 자기 가족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노인이라도, 심지어 조부모나 부모라도 얼마든지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의 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오늘날 상당 수 노인들이 자녀와 국가 양쪽으로부터 제대로 부양 받지 못한 나머지 자기방임에 의한 학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느는 추세다. 노인 스스로 의식주나 의료 처치 등 최소한의 자기 보호마저 포기하는 게 자기방임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방임의 극단이 노인자살로 표출될 수 있는데, 노인 자살률 또한 2014년 기준으로 인구 10만명 당 55.5명으로 세계 최고다. 고독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病)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존적으로 외롭고 물질적으로 궁핍한 상황이라면 죽음을 오히려 달가운 해결책으로 간주한 끝에 일어나는 것이 자살이 아닐까?

 

노인복지법

 

전통적으로 우리는 고려장이라는 풍습과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며 노인을 공경하던 전통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사실 고려장처럼 공동체 생존을 위해 노인을 버리던 전통은 말만큼 확인된 경우는 많지 않은 반면, 노인을 모시는 효의 전통에 대한 기록은 많았다.

 

자료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도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노인 포함)에게 입을 것, 먹을 것을 주었고, 고려시대에는 고령자들에게 특별한 하사품을 임금이 내려주었으며, 조선시대에도 경로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대명률이나 삼강행실도 설치 등의 제도·교육적 정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제도나 법률이 만들어졌다 하여 그것이 곧이곧대로 실행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마련이다. 그렇게 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며 제도적으로 불행을 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울러 기록에 없다 하여 정말로 없었다는 확신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현대에서는 제도에서 그 수준을 읽을 수 있고 또 그 현실을 유추할 수 있다. '노인복지법'은 노인의 심신 건강 유지와 생활안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강구하기 위해 지난 1981년 6월 5일 법률 3453호로 제정되었다. 그 후 1984년 12월 15일 법률 3755호로 1차 개정을 필두로 지금까지 수 없는 개정 절차가 반복되어 왔다. 그만큼 어려웠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준비가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법에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게 노인복지를 증진할 기본적인 책임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노인복지법이 제정된 지 3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노인들이 소외와 학대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현실이다. 말하자면 법이 세워졌다 하여 그것이 실현된다는 것은 아니란 의미다. 아울러 현실에 따라 법이 고쳐질 수 있지만, 잦은 법 개정이 곧 현실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처벌 원칙의 한계

 

2015년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노인 학대 신고 3818건 중 70%는 아들과 딸, 며느리 등 가족이 가해자였다. 보건복지부는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노인 학대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해 전국 경로당 6만3000여 곳을 학대노인지킴이집으로 선정하는 등 나름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하려 하였다. 동네 사정에 밝은 경로당을 활용해 지역 네트워크를 만들면 학대 노인을 조기 발견하고 적절한 대처가 가능할 것이라는 구상도 논리적으로 보면 괜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킴이집 운영이 겉도는 것도 문제지만, 노인들 스스로 학대 사실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는 점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게다가 이런 현실은 이심전심이다. 자식한테 학대당한 걸 떠벌려 보았자 결국은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라 생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다른 가정의 학대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걸 알리는 것이 덕이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 어렵다. 결국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깨닫고 노인들 스스로 자신의 복지를 보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 수 있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빈곤율이며 노인 자살률에 담긴 사정을 감안하면 그다지 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 하는가?

 

선진국이라고 노인문제가 없는 경우는 없다.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할 뿐, 적어도 지상에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 문제란 것의 해결 가능성과 해결 방식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나며, 그 개선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다만 정책적 우선순위와 정책적 의지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걸 바꿀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민주주의에서는 선거일 수밖에 없다. 우리보다 먼저 선진국이 된 나라들의 노인들은 복지 서비스의 보편화에 따라 우리 사회의 노인들처럼 가난하고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노인들이 사회복지 정책의 주요변수가 되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한 서비스 수급자격과 권리가 주어지면서 풍요한 노인계층을 일컫는 우피(Woopie:welloff older person)라는 단어가 나온 지도 20여 년이 지났다.

 

물론 우리 사회에도 '우피'들이 적지 않다. 다만 그 대척점에 선 가난에 허우적대고 폭력에 대책 없이 내몰린 노인들이 훨씬 많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근대화를 지상명령처럼 지향했던 우리나라에서 산업화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도시화를 초래했고, 도시화의 진전은 결국 전통적 대가족제도의 붕괴와 함께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자리를 위해서도 또 아파트를 통한 재테크를 위해서도 이사가 잦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마을 공동체란 것은 그저 단어로 그리고 먼 기억으로만 남은 것이 되고 말았다.

 

공동체가 아닌 행정단위 또는 재테크 공동체로서의 아파트 단지에서 빈곤은 울타리치기로 가시적 차원에서나 해결할 수 있지만, 노인문제는 그럴 수 없었다. 재테크(아파트 값)가 지상과제인 상황에서 노인문제는 거론될 여지조차 거의 없이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곧 노인학대의 온상이 되었다. 노인 학대는 결국 자본추구의 괴물이 되어버린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학대신고 자체가 침묵의 카르텔 속에 묻히고 만다.

 

결국 노인학대의 경우 다른 학대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문제로 인식돼 드러나는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러다보니 노인학대는 심각한 상황에 이를 때까지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체적 학대의 경우, 학대로 인식되기보다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부양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사고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에 학대피해 노인 상당수가 가족을 신고한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외부에 도움 요청을 꺼리고 있다. 내리사랑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자식으로 키운 자책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 카르텔로 작용한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

 

노인 학대와 노인 빈곤율이 더 이상 가족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이유들로 몇 가지 꼽아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가족문제를 가족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과는 어긋난 지 제법 오래 되었다. 산업화, 도시화, 아파트화 등은 이른바 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현실화되었고, 그러면서 가족 사이의 유대도 그만큼 약해졌다.

 

둘째, 한국 사회가 공동체 해체를감수하면서 채택한 자본주의적 효율화의 그림자를 그대로 가족에만 전가할 경우 공동체 해체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쉽다. 그래서 현재 아슬아 슬한 줄타기가 진행 중이다. 그나마 가족이 있는 경우 복지제도의 권리(혜택)를 보기 쉽기도 한데, 그럴 근거를 마련할 수도 없는 노인들은 더 심각한 극단으로 내몰린다.

 

셋째, 그래서 이대로 가족 차원에 맡겨둘 경우 이미 전조가 나타났듯이 중년, 아니 청년기부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면서 노후 대비로 전환한다. 그 결과가 바로 경제 흐름의 정체

요, 고용상황의 악화며 다시 장기 경기침체의 악순환이다. 이런 이유들로 해결의 실마리는 반대쪽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 노인세대와 곧 노인이 될 세대들은 현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백년지 대계'란 말처럼 자녀교육의 중요성만 강조하는 게 가능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럴 수 없다. 그저 재테크며 건강 등 개인적 차원의 노후대비보다 제도적 차원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스스로의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의 평생 교육과 연계하여 세상의 변화를 배우고, 더 필요한 부분에 대한 교육서비스와 함께 제도적 변화도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인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둘째, 이미 어느 정도 시작은 되었지만 주어진 현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아파트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재테크 수단에서 점점 멀어질 아파트를 생활 공동체로 만들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물론 가진 것이 아파트 하나뿐인 상황에서 시작하기 쉽지 않겠지만,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더 긴요하다. 공동체 의식없는 아파트단지는 정말 필요할 때 말고는 제 가치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 아파트야말로 재산적 가치도 유지할 수 있다.

 

셋째, 결국 모든 문제들은 하나로 연결된다. 어느 한 곳 아픈 곳을 잠시 참을 수는 있으나 계속 무시하다가는 큰병이 되어 사람이 죽을 수 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동안 최고 속도의 경제발달만 추구한 나머지 여러 가지 중요 기능들을 죽거나 마비되게 만들었다. 이제 다시 돌아보고 내다볼 때다.

 

노인학대와 노인자살이 이대로 늘어간다면 우리 사회는 가능성이 없다. 잠시 마취 당한 듯 여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노인이 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을 지원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이 기사는 월간 복지저널 2016년 10월호(통권 98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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