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달인은 행정가, 현장 실천가, 외교관 등 3가지 기질을 갖추어야 해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행정가밖에 안돼요. 현장을 뛰어 다니며 문제와 사람과 부닥쳐야 하고, 인적 네트워크도 잘 쌓아야지요."

원성춘 대표
원성춘 대표

"50년 넘게 사회복지업무에 종사했지만 상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상을 받을 때도 축하를 해줬지만 큰 욕심은 없었는데…. 이번에 큰 상을 받게 됐네요."

 

제14회 사회복지의 날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게 되는 참사랑복지재단 원성춘 대표(74)는 수상의 기쁨을 이렇게 담담히 풀어냈다.

 

원성춘 대표
원성춘 대표
원성춘 대표는 황해도 개성이 고향인 피란민이다. 열다섯 살 때 기차 화통 맨 꼭대기에 매달려 서울로 내려온 그는 서울에 있다던 작은 아버지도 만나지 못하고 외로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다행히 작은 누나를 만나 매형의 주선으로 공군에 입대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군을 제대하고 맨 처음 직장을 잡은 곳이 바로 한국사회사업시설연합회 인천시 지회였다. 그때가 1962년, 꼭 반세기 하고도 1년이 더 흐른 셈이다.

 

원 대표는 인천시지회에서 근무하면서 인천 30여개 아동복지시설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 당시는 모두가 어려운 시기, 그는 캐나다 유니태리안봉사회의 외원물자인 밀가루, 옥수수가루, 옷가지 등을 지원받아 아동시설에 나눠주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사회사업활동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바로 사회복지전문가가 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중앙신학교 사회사업학과(현 강남대)를 입학, 학업을 병행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8년 영아시설인 인천 해성보육원 총무로 자리를 옮긴다.

 

"영유아시설에 근무하면서 생명의 고귀함을 알려내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때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절대빈곤의 시대였습니다. 한 끼도 제대로 연명하기 어려운 영아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고자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등 입양기관을 통해 국외입양을 시켰지요. 우리 아이들이 좀 더 나은 생활 속에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8년 동안 1000명 이상 국외입양을 보냈습니다. 또 버려진 아이들의 성본을 창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일도 떠오르네요. 그들이 어른이 되어 찾아 온 적도 많아요. 자신의 뿌리인 성과 본을 갖게 해준 것에 감사하다면서…. 그럴 땐 정말 큰 보람을 느꼈지요."

 

1976년 장애인복지시설인 다니엘학원 사무장으로 근무지를 바꾼 그는 낡은 건물의 개‧보수를 위해 힘을 쏟았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지원으로 다니엘학원은 말끔히 새 집으로 단장됐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1962년 사회복지 첫발

 

"1960년대와 70년대는 사회복지시설에 변변한 지원이 없었어요. 정부로부터 하루에 1인당 쌀과 보리가 혼합된 주식 3홉과 부식비 3원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70∼80명의 식사를 위해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 맨 밑은 검게 타기 일쑤였고, 반찬이라야 배추를 소금에 절인 '김치'가 전부였지요."

 

그 당시를 회상하던 원 대표가 오랜 상념에 잠긴다. 6,70년대 아동분야와 장애인분야를 섭렵한 원 대표는 1982년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지만 노인시설협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회원시설도 운영이 버거우니 회비가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간부직원들은 1,2년씩 급여없이 무보수로 근무해야 했다. 사무를 보던 여직원은 당시 김용성 회장이 사비를 털어 '용돈'을 줘야하는 형국이었다.

 

원 대표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언제까지 회장의 주머니에 의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보건복지부를 찾아 갔지요. 사정을 설명하고 수익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겨우 화장지 판매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때 전국에 8개 지부가 있었는데, 지역 어르신을 판매원을 활용해 화장지를 팔았습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일자리였고, 노인시설협회와 지부는 수익사업이었지요. 화장지를 판매한 어르신들은 인건비를 충분히 건졌고, 일부 수익금은 협회와 지부의 운영비와 인건비로 충당했습니다."

 

지금은 '한국노인복지중앙회'로 명칭이 바뀐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와 지부의 운영이 정상화 된 것은 2005년까지 22년 동안 벌인 이 수익사업 덕분이었다.

 

원 대표는 1982년 부산 애광노인요양원 원장으로 취임하는 등 노인복지와 인연을 계속 이어가다 1989년 우리나라 최초의 노인복지관인 서울시립남부노인종합복지관(현 관악노인종합복지관) 설립 멤버로 참여한다. 모든 것이 처음이어서 그 무렵 직원들은 6개월간 예산, 조직, 프로그램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새로 짜고 개발해야 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복지관 설립과 개관 업무에 매달렸습니다. 막 건립된 복지관 건물 한 귀퉁이에서 잠을 자면서 즐겁게 일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각 기초자치단체마다 거의 노인복지관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노인복지관 개관은 처음이었으니 우리가 얼마나 사명감을 컸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노인복지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도 대단했지요. 그때가 가장 기쁘게 일한, 가장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흐뭇합니다."

 

-"우리나라 최초 노인복지관 개관 작업 가장 기뻐"

 

원 대표는 서울시립남부노인종합복지관 사무국장과 서울시립북부노인종합복지관장직을 8년 동안 지내며 주간보호 및 홈 헬퍼 파견사업, 의료지원, 물리치료, 작업치료, 노인급식, 사회교육 등 각종 노인복지프로그램 개발과 시범사업이 정착되는데 기여했다. 이 사업들은 지금도 전국 노인복지관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렇게 사회복지시설과 기관에서 근무하며 익힌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그는 1998년 복지법인경영연구소를 설립, 무허가 사회복지시설을 법인으로 전환토록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설립 후 10여년 동안 그의 손을 거쳐 법인시설로 탈바꿈한 무인가 시설이 40여곳에 이를 정도다.

 

현재 대표로 있는 노인요양시설인 참사랑복지재단은 2005년부터 맡고 있다. 처음 대표로 취임할 당시 시설은 무허가였을 뿐 아니라 현관부터 화장실까지 비가 샐 정도로 노후화가 심각했다.

 

"3,40명의 어르신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건물이 낡아 건강에도 좋을 것 같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새로 건축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충남도청과 당진군청을 발이 닳도록 뛰어 다녔지요. 서류를 넣으면, 반려되고 그러면 또 서류를 넣고…. 엄청난 줄다리기 끝에 허가를 받고 정부로부터 시설보강비 17억5000만원을 지원받았어요. 여기에 자부담 4억을 합해 총 21억 5000만원으로 총 2040㎡규모의 지하 2층 지상 3층 건물을 완공시켰습니다. 지금은 60여명의 어르신들이 깨끗하고 쾌적한 주건환경 속에서 생활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렇게 쉼 없이 51년 동안 사회복지현장을 달려 온 원 대표는 지금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내년 6월 경 출간될 자서전에는 51년 간 현장에서 부닥치며 사회복지의 길을 헤쳐 온 그의 '희노애락'과 뒷얘기까지 날 것 그대로 담겨질 예정이다.

 

"사회복지 달인은 행정가, 현장 실천가, 외교관 등 3가지 기질을 갖추어야 해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행정가밖에 안돼요. 현장을 뛰어 다니며 문제와 사람과 부닥쳐야 하고, 인적 네트워크도 잘 쌓아야지요." 원로사회복지사인 그가 후배들에게 남기는 말이다.

 

※ 이 글은 월간 복지저널 제61호(2013.9)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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